[김성재의 국제금융 인사이트]
신뢰도와 유동성 저하로 당분간 불가능

달러화는 2차세계대전이 종료하면서 공식적인 글로벌기축통화가 되었다. 전후 세계 금융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달러화를 표준으로 해 환율을 정하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달러의 가치를 보증하기 위해 금과 일정 비율로 교환할 의무가 부과됐다.
그런데 지속적인 무역수지 적자로 더 이상 달러를 금과 교환해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1971년 닉슨 대통령은 브레튼우즈 체제의 포기를 선언했다. 그 의미는 컸다. 이제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금 보유량에 상관없이 달러를 맘껏 찍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법정화폐(fiat money)로서 달러의 가치는 이를 발행한 미국 정부의 실력에 의해서만 보장될 뿐이었다. 그 후 달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실질적 움직임으로 나타난 것이 1975년을 즈음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간 합의로 탄생한 페트로달러(petrodollar) 시스템이었다.
페트로달러 시스템은 미국과 사우디 사이의 상호필요적 요인에 기인했다. 미국으로서는 필수적 자원으로서 국가 안보와 직결된 원유 수급을 안정화하는 한편, 국제 원유 거래에 달러화만 사용케 함으로써 국제금융시장에서 달러화의 우월적 지위를 공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한편, 사우디로서도 당시 세계 1위 원유 수입국으로서 각국 중앙은행들의 외환보유고에서 70% 이상을 차지하는 달러화 사용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미국의 해군력이 원유 보급로를 지켜주고 사우디의 안보를 책임지면서 자연스럽게 윈윈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 이후로 현재까지 달러화는 글로벌 기축통화의 지위를 꿋꿋하게 지켜왔다. 물론 달러화의 지위가 위협당할 것이라는 논의는 197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혹자는 미국 제조업 경쟁력 약화를 이유로 들기도 했고 혹자는 유로 등 경쟁 통화의 등장을 이유로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데믹 이전까지 달러화의 글로벌 패권에 대한 도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미국과 사우디 간 밀월이 깊었고 G-7을 중심으로 한 서방 강대국들도 암묵적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국제 기축통화로서 달러화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탈(脫) 달러(De-dollarization) 움직임이 중동과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 국가를 중심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우선 지난 1월 다보스포럼에서 사우디 재무장관인 알-자단이 국제 원유 결제에 달러 이외 통화 사용을 시사함으로써 페트로달러 시스템의 균열을 공식화했다.
또한, 최근 중국해양석유공사(CNOOG) 그룹이 프랑스 에너지 기업 토탈(TotalEnergies)로부터 UAE 원산인 6만5000t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를 수입하면서 결제 대금을 위안화로 지급해 페트로달러 체제의 종식이 실질적으로 진행 중임을 알렸다.
여기에 브라질도 중국과의 철광석 및 콩류 거래에 달러화를 패싱하고 위안화와 헤알을 사용할 것이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브라질의 외환보유고에서 위안화가 차지하는 비중을 높여 왔음을 시사했다. 실제 브라질은 2018년까지 외환보유고로 위안화를 전혀 보유하지 않았으나 최근에는 위안화 비중이 유로화를 앞질러 달러화에 이어 2위를 차지하게 됐다.
최근 미국이 관계 개선에 역점을 두고 있는 인도도 마찬가지다. 인도중앙은행은 독일과 러시아를 비롯한 18개 국가의 은행들이 인도의 국내은행에 이른바 보스트로(Vostro) 계정을 개설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를 통해 외국 은행은 인도 루피화로 국제결제를 직접 지시할 수 있게 됐다. 즉, 국제결제에서 달러 비중을 줄이고 자국 통화 사용을 늘리려는 시도다.

브릭스의 일원인 남아공도 빠지지 않았다. 남아공 외무장관인 팬도(Pandor)는 지난 1월 한 인터뷰에서 달러의 우월적 지위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달러를 우회하는 보다 공정한 결제 시스템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달러 패권에 대한 도전을 공식화한 것이다.
물론 브릭스 국가들의 달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국제 결제 시스템에 대한 수술 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4년 브라질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담에서 이미 신개발은행(New Development Bank) 설립에 합의하면서 달러를 대체할 결제 시스템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브릭스 국가들이 이처럼 달러 헤게모니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미국의 과도한 달러 무기화에 대한 저항을 들 수 있다. 달러가 국제결제 수단으로 사용되면 달러 이체는 미국에 소재한 대행(correspondent) 은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국제결제망인 스위프트(SWIFT)로 이체 요청을 하면 연준 내에 설치된 미 국내 은행의 지불준비금(지준) 계좌를 통해 은행 간 달러 자금 이동이 발생한다. 이는 마음만 먹으면 미 정부와 연준이 자금 이동 상황을 수시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미 정부는 그 자료를 바탕으로 해 불법 자금세탁 등을 이유로 계좌를 동결하거나 달러 자산을 압류할 수 있다. 또한, 핵무기 개발이나 테러 지원 등의 혐의를 받는 국가를 제재하면서 그 자산을 동결하기도 한다. 과거 리비아와 최근 북한이나 이란이 그 예다.
무엇보다 작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러시아 중앙은행의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가 동결되었다. 몇천억 달러의 미 국채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미국의 헤게모니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모골이 송연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결국 브릭스 달러 체제 도전은 중국과 러시아가 앞장서고 기타 국가도 동조하면서 표면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달러의 시대는 이대로 저물고 마는 것일까? 기축통화의 역사를 보면 글로벌 기축통화는 평균적으로 90~100년을 주기로 바뀌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주기로 스페인-네덜란드-프랑스-영국-미국이 통화 패권을 주고받았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달러 패권을 형성한 지도 어느덧 80년이 다 돼간다. 그런데 글로벌 기축통화 이전은 지정학적 패권의 이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관계를 가진다. 결국 달러의 종말 여부는 중국이 미국의 지정학적, 경제적 패권을 탈취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지정학적으로 미국의 입지가 약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미국은 셰일 혁명 이후 중동으로부터 원유 수입이 불필요해진 반면에 중국은 제1의 원유 수입국 지위를 획득했다. 우크라이나를 전폭 지원하면서 러시아와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둘째, 경제적으로 중국이 미국을 밀어내고 세계 최대의 제조업 국가 및 무역 국가가 되었다. 이를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외환을 바탕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세계 최대의 인구를 바탕으로 여전히 강력한 성장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관건은 과연 중국이 미국을 국제 경쟁 무대에서 대체할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중국의 GDP는 여전히 미국의 70% 안팎이다. 경제성장률은 급격히 꺾이고 있다. 첨단 산업에서 기술 경쟁력은 뒤지고 있으며 군사력과 금융산업의 경쟁력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거기에다 미국 정계는 여야 가릴 것 없이 중국 견제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이는 달러 패권이 여전히 견고한 상태에서 중국에서의 투자와 자본 이탈을 의미한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신뢰도와 유동성에서 현격히 떨어지는 위안화가 달러화를 대체하기란 당분간 불가능해 보인다. 등소평의 ‘도광양회’를 저버린 중국의 설익은 오만함이 톡톡한 대가를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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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재 가드너웹대학교 경영학교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종합금융회사에서 외환딜러 국제투자업무를 7년간 담당했고 예금보험공사에서 6년간 근무했다. 미국에서 유학하여 코넬대에서 응용경제학석사,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경영학박사 (파이낸스)를 취득했다. 2012년부터 노스캐롤라이나주 가드너웹대학교에서 재무·금융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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