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미의 보석상자] (51)
주얼리 공모전 시즌 1 출품작
쪽진 머리에 반지 3개 즐겨 끼던 증조할머니
1912년-40년-64년-87년생, 4대째 물려온
애장품 반지를 간직하게 된 증손녀 사연

증조할머니는 꼬깃꼬깃 장롱 속에 넣어 놓은 귀한 캐러멜을 꺼내 늘 내게 주셨다. /픽사베이
증조할머니는 꼬깃꼬깃 장롱 속에 넣어 놓은 귀한 캐러멜을 꺼내 늘 내게 주셨다. /픽사베이

100세를 한 달 남겨두고 돌아가신 증조할머니(1912~2022년)는 매일 리추얼(Ritual, 규칙적인 습관을 의미)이 있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던 증조할머니는 새벽에 기상해 머리를 싹싹 빗으셨습니다. 그리곤 비녀로 정갈하게 쪽졌습니다. 아침마다 우면산에 산책을 가셨고 아침 미사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전에는 봉사 활동을 꾸준히 했습니다. 집 근처 대학병원에서 거즈를 접는 자원봉사를 90세까지 했을 정도였습니다. 건강 관리도 잘하셨어요. 늘 소식하며 용천혈 마사지를 즐겼고 저녁 6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이런 자기 관리가 100세 장수의 원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쪽 찐 머리에 반지 3개 즐겨 끼던 증조할머니의 유품 반지들 /미래보석감정원
쪽 찐 머리에 반지 3개 즐겨 끼던 증조할머니의 유품 반지들 /미래보석감정원

자기 관리에 빈틈없던 증조할머니에게는 또 하나의 리추얼이 있었습니다. 바로 양 손에 낀 반지입니다. 장식이 없는 은반지와 금반지를 검지와 약지에 착용하셨는데 주로 양손에 총 3개를 끼곤 하셨습니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면서 증조할머니는 항상 반지로 스타일링을 마무리했습니다.

1987년 차지연 님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엄마-할머니·할아버지-증조할머니와 나(아기)-삼촌 /차지연
1987년 차지연 님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엄마-할머니·할아버지-증조할머니와 나(아기)-삼촌 /차지연

증조할머니는 애지중지하던 반지들을 손녀며느리(58세)에게 주셨습니다.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날 말입니다. 반지를 물려받은 손녀 며느리는 35세의 딸에게 반지를 주었습니다. 증조할머니의 애장품이던 반지를 증손녀가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은 쿠키를 구워주는 다정하고 재미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은 30대 직장인 차지연 님(1987년생, 이하 나)의 사연입니다.

내가 돌을 맞았을 무렵 우리 집은 무려 4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1987년 가족사진에는 증조할머니-할머니·할아버지-엄마와 내가 있습니다.

4대가 함께 살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내가 돌이 지난 즈음 증조할머니는 패혈증 등의 건강 악화로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당시 증조할머니와 같이 살던 할머니가 도무지 간호할 자신이 없다고 하셔서 새색시였던 엄마가 병간호하게 되면서 지방으로 이사해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1988년 8월 28일 돌잔치 날, 증조할머니가 나(차지연)를 안고 있다. /차지연
1988년 8월 28일 돌잔치 날, 증조할머니가 나(차지연)를 안고 있다. /차지연

20대였던 엄마의 극진한 간호로 증조할머니는 건강을 되찾았고, 100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증조할머니가 건강을 회복한 후 우리 집은 다시 서울로 이사를 왔고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평생을 함께 사셨습니다.

한번은 엄마가 시어머니인 할머니께 금반지를 선물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변변찮은 반지 하나 없는 시어머니를 위한 며느리의 선물이었습니다. 엄마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금붙이를 모아 모두 녹여 금반지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값 나가는 보석은 아니지만 반짝이는 작은 큐빅도 금반지에 박았습니다. 예쁜 금반지가 생긴 기쁨도 잠시, 아쉽게도 할머니는 바로 그날 반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렸던 그 반지는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날 찾을 수 있었습니다. 30년 만이었습니다. 자꾸 물건을 잃어버리는 할머니를 대신하여(?) 증조할머니가 30년간 안전하게 간직했던 겁니다. 그 반지를 증조할머니는 다시 손녀 며느리의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말입니다.

1988년 8월 28일 돌잔치 날, 할머니가 나(차지연)를 안고 있다. /차지연
1988년 8월 28일 돌잔치 날, 할머니가 나(차지연)를 안고 있다. /차지연

분실했던 반지를 본 순간, 할머니보다 엄마가 더 놀랐습니다. 늘 물건을 잘 잃어버리셨던 할머니는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에게 반지를 선물했던 엄마는 30년 전 반지를 잃어버렸을 때 장롱 밑바닥까지 다 뒤졌고, 온 동네 사방팔방을 다니며 몇 날 며칠 동안 찾았다고 합니다. 그게 증조할머니에게서 나왔다니···. 그걸 엄마에게 돌려주려고,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그 오랜 시간 가지고 계셨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증조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때도 늘 끼고 있던 반지는 아무에게도 맡길 수 없다고 하셨답니다. 그 좋아하던 아들(할아버지)에게도 반지를 안 주시겠다고 하셔서 모두가 난처해했습니다. 한번 아니라고 하면 아닌, 고집이 대단하던 증조할머니였습니다. 병원에서 여러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반지는 어떡하실 거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아무에게도 안 주시겠다며 그냥 반지를 계속 손에 끼고 계시던 증조할머니였어요.

엄마가 금을 녹여 할머니께 선물로 드렸던 큐빅 금반지 /미래보석감정원
엄마가 금을 녹여 할머니께 선물로 드렸던 큐빅 금반지 /미래보석감정원

그러던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병원 분들에게 “손부(엄마) 오면 꼭 주라”며 꽁꽁 싸맨 주머니를 내미셨다고 합니다. 거기엔 엄마가 30년 전에 만들었던 큐빅 금반지를 포함해서 또 다른 금반지와 은반지, 금비녀 등 모두 5개의 애장품이 담겨 있었습니다.

증조할머니는 쓰시던 다듬이, 다듬잇방망이, 항아리, 절구, 놋대야, 일기 같은 책 등을 돌아가시기 훨씬 이전 엄마에게 물려주셨습니다. 증조할머니가 시집올 때 해온 예물이라고 하셨어요. 엄마가 잘 간직할 것 같아서 그런 듯합니다.

반지를 주신 날은 나에게도 증조할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모여 증조할머니의 임종을 함께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엄마 생일날 돌아가셔서 우리 가족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성인이 된 후 나는 꼬장꼬장한 증조할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무뚝뚝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증조할머니이셨습니다. 나에게는 외국어 같았던 어려운 경상도 사투리 때문인지 대화를 제대로 이해 못 할 때도 있었지만 댁에 갈 때마다 꼬깃꼬깃 장롱 속에 넣어 놓은 캐러멜을 꺼내 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증조할머니는 요즘처럼 인생을 즐기며 살지 못하셨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고생을 많이 하셨죠. 이번 주얼리 공모전 포스터를 보고 늘 밥걱정, 아들 걱정을 하시던 할머니의 보물 창고, 장롱이 생각나서 공모전에 응모하게 됐습니다.

나는 증조할머니를 대신한 반지의 ‘새로운 지킴이’가 되었다. /미래보석감정원
나는 증조할머니를 대신한 반지의 ‘새로운 지킴이’가 되었다. /미래보석감정원

장롱 속 보물이던 할머니의 애장품이 지금은 나에게 있습니다. 엄마가 다시 내게 물려 주셨어요. 나는 보석감정사이자 월곡주얼리산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네가 주얼리 전문가다”라며 내게 반지를 맡기셨습니다. 지금은 내가 반지의 새로운 주인입니다.

엄마가 시어머니(할머니)에게 만들어 드렸던, 증조할머니가 몰래 30년을 간직하셨던, 마지막 날 엄마에게 되돌려준 사연 많은 큐빅 금반지. 4대째 대물림해오는 반지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나는 반지의 ‘새로운 주인’이라기 보다는 증조할머니를 대신한 반지의 ‘새로운 지킴이’라는.

월곡주얼리산업연구소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차지연 연구원(오른쪽). /차지연
월곡주얼리산업연구소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차지연 연구원(오른쪽). /차지연

대학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차지연 님은 대학에서는 물론 졸업 후 공방에서 일하며 직접 주얼리를 만들었습니다. 주얼리 가게에서 판매해본 경험도 있고, 럭셔리 브랜드에서 마케팅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국내 유일의 주얼리 전문 연구기관인 월곡주얼리산업연구소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근무 중입니다. 주요 업무는 국내외 자료를 수집하고, 방출하는 일입니다. 또한 한국갤럽과 진행하는 소비자 조사와 프로젝트 연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얼리 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업무 관련으로 보석감정원을 가본 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주얼리 감정을 위한 보석감정원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이번 공모전을 통해 미래보석감정원에서 큐빅 금반지를 감정받았습니다.

정작 나의 주얼리 감정을 위한 보석감정원 방문은 처음이었다. 보석감정서를 보니 유품 반지가 너무나도 특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미래보석감정원
정작 나의 주얼리 감정을 위한 보석감정원 방문은 처음이었다. 보석감정서를 보니 유품 반지가 너무나도 특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미래보석감정원

알고 있던 대로 금 소재에 보석은 합성 큐빅 지르코니아였습니다. 처음 받아본 감정서는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할머니 반지 사진이 나와 있는 감정서를 받자 반지가 너무나도 특별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집문서를 갖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평생을 증조할머니와 같이 사셨던 할머니(1940년~2022년)는 증조할머니가 떠난 지 몇 달 되지 않아 바로 뒤이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렸을 때는 몰랐습니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내게 너무나 큰 존재였다는 것을···.

하지만 그런 마음을 제대로 표현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옛날이야기도 많이 나누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래서인지 차지연 님은 말합니다. “저는 나중에 할머니가 되면 손주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는 다정한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차지연 님은 꿈이 있습니다. ‘주얼리의 즐거움’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주얼리를 만들 때는 작품으로 알리고 싶었고, 지금은 연구소에서 보고서나 콘텐츠 등으로 알리고 싶다고 합니다. 차지연 님은 다음과 같이 공모전에 응모한 소감을 전했습니다.

“주얼리 공모전을 통해 소중한 추억을 되새김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나 기쁩니다. 제게 증조할머니의 유품은 온기가 느껴지는 정(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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