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미의 보석상자] (54)
‘석담 황금보석박물관’에 전시된 거북선 사연
타출·세선 기법의 대가 '박해도 장인' 작품
롯데 금거북선 이후 35년 만에 다시 대작 완성
화재로 모든 것 잃은 그에게 박물관 측 지원

석담 황금보석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석담 거북선 /석담 황금보석박물관
석담 황금보석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석담 거북선 /석담 황금보석박물관

반포대교에서 강변북로를 차로 30여 분 달려가 ‘석담 거북선’을 만났다. 거북선은 석담 황금보석박물관(이하 황금보석박물관)에 있는 순은(純銀)과 순금(純金)으로 된 거북선이다. 황금보석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민간 주얼리 박물관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2021년 11월 개관했다. 귀금속 정련 및 분석업체인 (주)삼덕금속 최팔규 회장(62)이 설립자로 사재를 털어 10여 년간 준비한 곳이다. 석담은 설립자의 호다.

박물관에 있는 거북선에 들어간 은과 금은 각각 55kg(1만 4700돈), 0.1125kg(30돈)이다. 크기는 가로 103cm 높이 133cm 길이 120cm로 이순신 장군의 위풍당당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위엄한 자태였다.

이순신 장군(1545~1598)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거북선을 전함으로 사용했다. 노를 젓는 1층과 함포를 발사하는 2층으로 구성된 크고 높은 배로 2개의 돛이 기동력을 높여 적의 배 사이로 깊숙이 침투할 수 있었던 조선 수군 최고의 무기였다.

거북선 등판에는 뾰족뾰족한 철심이 박혀 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왜군이 쉽게 배 위에 뛰어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거북 뱃머리에 달린 용머리와 도깨비 머리가 적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박해도 장인(71)은 이런 거북선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실감 나게 금속으로 표현했다. 그는 ‘거북선의 달인’으로 불린다.

박해도 장인 /석담 황금보석박물관
박해도 장인 /석담 황금보석박물관

박해도 장인은 1987년, 롯데그룹(당시 신격호 회장)의 의뢰로 순금 30kg(8000돈)으로 된 황금 거북선을 만들어 화제를 불러일으킨 일이 있다. 당대 최고의 거북선 제작 실력자임을 입증한 것이다. 그가 만든 ‘롯데 금거북선’은 지금도 롯데호텔 뮤지엄에 전시 중이다.

이번 석담 거북선은 대형으로 제작한 두 번째 거북선이다. 제작 방식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공예 기법인 타출(打出) 기법이다. 정과 망치로 얇은 금속을 두드려 표면에 원하는 모양을 표현하는 기술이다. 세선(細線) 기법도 활용했다. 가는 선을 꼬고 굽혀서 여러 가지 문양을 만들었다. 거북선의 달인 박해도 장인을 지난 5월 10일 서울 정릉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작업실에서 타출 기법에 대하여 설명하는 박해도 장인. /미래보석감정원 구창식
작업실에서 타출 기법에 대하여 설명하는 박해도 장인. /미래보석감정원 구창식

—언제 금속 공예에 입문했나.

“14살 되던 해, 90대 스승을 만나 타출을 배웠습니다. 당시만 해도 스승님이라고만 불러서 스승의 이름도 모릅니다. 스승은 조선시대 왕실의 은장이었습니다. 15살 말경에 스승이 돌아가시고 나서 타출을 접고 살았습니다. 16살이던 1968년 8월경 세공 기술자로 ‘장미사’라는 곳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손재주가 뛰어나 주문이 쇄도했고 2년 만에 공장장 자리에 올라 오랜 기간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 그래. 망치와 연장 몇 개만 갖고 할 수 있는 게 이거지’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타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거북선을 만들게 된 계기는 우리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끼고 이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크고 작은 거북선을 만들어 여러 조선소와 기관에 납품하고 판매도 하면서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러다가 큰 거북선을 만든 것이 롯데에서 의뢰하여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제작한 순금 거북선입니다.”

박해도 장인이 타출 기법으로 만든 주전자와 세선 기법으로 만든 잔. /미래보석감정원 구창식
박해도 장인이 타출 기법으로 만든 주전자와 세선 기법으로 만든 잔. /미래보석감정원 구창식

—롯데 거북선을 만들게 된 계기는.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개최 때 롯데 그룹에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우리 전통과 역사를 알린다는 취지로 롯데호텔 내 거북선 광장을 조성하고 황금 거북선을 선보였습니다. 이를 위해 여러 대학 교수까지 동원해 순금으로 거북선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을 한국과 일본까지 수소문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이 작품은 제 임의대로 만든 창작품이 아니라 학계에서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토대로 고증을 통해 도면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도면이 나오고 도면은 바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처음엔 거북선을 일본 금속공예 문화재가 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과 전쟁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북선을 어떻게 일본에서 만드냐’는 일부 학계의 반론이 제기되면서 제작을 국내업체 경화당이 수주하게 되었습니다. 경화당은 거북선 전문가인 저와 인연이 되어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 나이가 35세로 비교적 젊어서인지 저의 실력에 반신반의하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도면을 받은 후 제가 구체적인 제작 방법을 도면에 부분마다 적었습니다. 그것을 일본 사무실로 팩스를 보내 담당자가 일본의 장인을 찾아갔습니다. 거기 답이 뭐라고 딱 와 버렸냐면 ‘자기도 자신이 없어서 얘기를 못 했는데 거기에 우리 스승이 쓰던 기법이 80%다. 근데 스승이 쓰지 않는 기법이 20%가 있다. 나이에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 맡겨라’ 고 왔어요.

그러면서 일본의 문화재 위원이 오히려 제 기술을 배우러 한국으로 오겠다고 했습니다. 저의 기술을 알아본 일본의 문화재 위원 덕분에 당시 30kg(8000돈) 금 거북선을 제가 만들 수 있었습니다.”

석담 거북선 /석담 황금보석박물관
석담 거북선 /석담 황금보석박물관

—석담 거북선에서 타출 기법과 세선 기법을 설명해 준다면.

“거북선 용머리의 수염이나 귀, 입안의 혀와 포를 타출 기법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돛은 세선 기법으로 은사(銀絲)가 마치 삼베처럼 촘촘히 엮여 있지요. 이순신 장군의 투구를 비롯해 부분적으로 금장식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금을 얇게 바르는 금부 기법입니다.”

—석담 거북선과 롯데 거북선의 차이점은.

“롯데 거북선은 ‘졸작’입니다. 이전에도 말한 적이 있었는데, 작품 자체가 졸작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작품 크기에 비해 원자재(순금) 사용이 너무 적어서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 정도 크기(가로 56cm×길이 140cm×높이 125cm)로 제대로 만들려면, 순금이 108kg(2만 8800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30kg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줄이고 줄여서 만들었습니다. 작품이 튼튼하지 못하고 약합니다.

이에 반해, 석담 거북선은 재료를 충분히 사용해 튼튼하고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35년 전의 롯데 거북선이 기초가 되었습니다. 달라진 부분도 있는데, 침이 박힌 거북선 등판의 육각판을 음각에서 양각으로 제작했습니다. 특히 거북선의 내부를 2층으로 만들어 포를 쏘는 곳과 노를 젓는 공간을 구분해 보이지 않는 내부까지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여러 곳에 설치돼 있지만 저는 광화문에 있는 동상을 기초로 했습니다. 광화문의 동상은 장군이 오른손에 칼을 잡고 있는데 사실 장군은 오른손잡이입니다. 따라서 칼을 사용할 땐 오른손에 있어야 하지만 허리에 차고 있는 칼집은 왼쪽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왼쪽에 만들었습니다.”

롯데 금 거북선을 만든 이후, 박해도 장인은 ‘거북선 대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후 국립 민속박물관 옛 활자체 복원작업(2001년), 일본 도쿄 주얼리쇼 은 대독수리 출품(2003년), 세계명인문화예술대축제 금속공예부문 대한명인상 수상(2007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화재에서 겨우 건진 작품 중 양호한 상태의 머리 부분(왼쪽)과 불에 탄 몸통. /민은미
화재에서 겨우 건진 작품 중 양호한 상태의 머리 부분(왼쪽)과 불에 탄 몸통. /민은미

그러나··· 7년 전, 그는 삽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2017년 구정을 앞두고 작업실을 모두 불태운 화재 때문이다. 고가의 귀금속이 작품의 원자재인 만큼 그는 전 재산을 투자해 재료를 샀다. 그것을 동대문 작업실에 보유하고 있었다. 작업실 건물은 가족이 거주하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방화범의 우발적인 소행으로 불이 나 원자재는 물론이고 그의 모든 작품이 재로 변했다. 남은 건 검게 그을린 몇몇 집기뿐이었다.

새벽 6시경 집에서 잠자던 두 딸과 박해도 장인은 코앞으로 매섭게 다가오는 불길에 4층에서 뛰어내렸다. 기적적으로 박 장인은 무사했으나 두 딸은 심한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한순간 그의 모든 것이 날아갔고, 그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줄기 빛이 있었다. 우연히 지난 2019년에 황금보석박물관 설립자인 최팔규 회장을 만났다. 최팔규 회장은 박물관 개관을 위해 다양한 소장품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가 박해도 장인에게 한 첫 제안은 "낡은 헌 작업대를 박물관으로 가져가는 대신 새 작업대를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화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작업대였다. 박해도 장인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최 회장은 이런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박해도 장인의 작품집을 봤다. 작품의 우수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최 회장은 박 장인에게 “원자재를 마음껏 쓸 수 있도록 지원할 테니 타출과 세선 기법으로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박해도 장인의 작품 공작과 부엉이. 공작은 세선 개법으로 만든 작품으로 제작에 1년이 넘게 소요됐다. /석담 황금보석박물관
박해도 장인의 작품 공작과 부엉이. 공작은 세선 개법으로 만든 작품으로 제작에 1년이 넘게 소요됐다. /석담 황금보석박물관

실의에 빠져 있던 박해도 장인은 황금보석박물관을 위해 작품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만이 화마(火魔)로 인해 생긴 절망을 극복할 유일한 출구이기도 했다.

그가 박물관을 위해 만든 첫 작품은 공작이다. 암수 한 쌍의 공작(박물관 2층 전시 중)은 세선 기법으로 만든 작품으로 제작에 1년이 넘게 소요된 대작이었다. 다음은 부엉이, 소달구지, 호랑이 등이다. 토요일, 일요일에 쉬지 않고 밤낮으로 몰두해 급기야는 쓰러져서 병원 신세도 졌다.

이 과정에서 박해도 장인은 화재 이후 손 놓았던 작업에 다시 빠져 들었다. 화재 이전으로 되돌릴 순 없었지만, 결국은 깊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거북선을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박해도 장인)이 죽으면 저런 거북선은 다시는 나올 수 없다”며 최 회장에게 그의 실력을 전했다.

「국회특별기획전」전시회에 참여한 석담 거북선 /석담 황금보석박물관
「국회특별기획전」전시회에 참여한 석담 거북선 /석담 황금보석박물관

최 회장도 마음을 굳혔다. 그리곤 이렇게 제의했다. “거북선 중량은 얼마가 나가든 상관없다. 거북선을 만들자”. 롯데와 만든 30kg짜리 거북선보다 금과 은을 더 써도 좋으니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의미였다.

박해도 장인은 대작을 만들자는데, 그것도 일생을 바친 거북선을 제작하자는데 뜨거운 마음이 치솟았다고 한다. 57년 금속 공예 외길 인생의 가장 큰 도전에 나섰다.

롯데 거북선 때는 재료가 부족해서 할 수 없던 부분을 보완해 가며 한땀 한땀 혼을 실었다. 특히 포나인(99.99%)의 순은과 순금을 사용해 투 톤 컬러로 제작하면서 거북선의 조형미를 더욱 화려하게 표현해 나갔다.

대작을 만들다 보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몸이 지치는 경우가 많다. 심장병이라는 기저질환으로 인해 거북선을 만드는 과정에서 병원 신세도 져야 했지만 거북선을 향한 그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마침내 35년 만에 다시 순금과 순은으로 된 박해도 장인의 거북선 대작이 탄생하게 되었다.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역대 거북선 가운데 가장 크고 무거운 작품이다. 제작 기간만 1년 6개월이었다. ‘석담 거북선’으로 이름 붙여져 2022년 11월 5일부터 황금보석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석담 거북선에 든 원자재 가격은 얼마인가.

“제작 당시, 순은 5500만원, 순금 1000만원선으로 총 6500만원입니다.”

—석담 거북선을 금액으로 평가한다면 가격은 얼마인가.

“제가 만든 작품이지만 석담 박물관의 소장품입니다. 저는 성심을 다해 작품을 만들 뿐, 작가가 내 작품에 금액을 매긴다는 건 저는 우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작년 12월 「정부조달문화상품 세계화를 위한 국회특별기획전」에 전시했을 때, 어느 분이 제게 가격을 문의하셨습니다.

당시 즉흥적으로 ‘10억’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아파트 한 채 값이네요’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설명했습니다. “재능있는 연예인들이 광고 한번 찍으면 억대를 받습니다. 제가 한평생 이 길을 걸어오면서,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기능인이 이걸 만들었다면 그게 10억 값어치가 안 되겠습니까”라고.“

박해도 장인의 주얼리 제품. 아름다운 봄날 벚꽃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브로치 겸 펜던트로 다채로운 유색 보석이 세팅되어 있다. 박물관 내 주얼리 샵에서 판매하고 있다. /석담 황금보석박물관
박해도 장인의 주얼리 제품. 아름다운 봄날 벚꽃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브로치 겸 펜던트로 다채로운 유색 보석이 세팅되어 있다. 박물관 내 주얼리 샵에서 판매하고 있다. /석담 황금보석박물관

—박해도 장인에게 거북선은 어떤 의미인가.

”거북선은 저를 여태까지 먹고 살게 한 바탕입니다. 거북선을 만들어 대우조선, 현대조선 같은 조선소에 납품했고 청와대에 납품했습니다. 제 이름을 알리게 된 것도 거북선 때문입니다.“

—박해도 장인에게 타출은 어떤 의미인가.

”타출이라는 개념이 무척 매력적입니다. 손으로 두드려서 입체적인 모양이 나기 때문에 똑같은 그림이라 해도 모두 틀린 그림이 됩니다. 손으로 두드리는 망치의 맛. 핸드 메이드로 나타나는 문양은 기가 막힙니다.

저를 다시 살게 한 것이 타출입니다. 사실 거북선을 이때까지 쭉 해오다가 불이 나면서 자재, 부속들, 제작 기구들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그 기구 없이 맨주먹으로 거북선을 만들려니까 너무 힘이 들었어요. 그러다 묵혀 놓은 타출을 다시 시작하고 자리를 잡게 됐습니다. 석담과의 인연도 타출 작품으로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석담 최팔규 회장이 없었다면, '공작', '부엉이', '거북선', '소달구지' 등 많은 작품들이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석담은 제가 작품을 다시 할 수 있는 언덕을 만들어줬습니다. 큰 고마움입니다.“

—앞으로 작품 계획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언을 작품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거북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입니다. 또한 제 작품을 주얼리로 많은 이들이 착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타출 기법으로 만든 보타이 목걸이와 공작 브로치 겸 목걸이가 있고 뻐꾸기와 벚꽃 등을 만들었는데, 더 많은 주얼리를 내놓을 겁니다.“

—향후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이번 작업을 통해서 우리의 금속 공예가 더 많은 발전을 이루길 기대합니다. 거북선과 같은 대작을 만들려면 정말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제가 더 나이를 먹기 전에 훌륭한 제자가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타출 기법과 세선 기법이 미래에도 이어지고 더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콩깍지 끝을 보세요. 뽀송뽀송한 털이 있지요? 어떤 작품이 됐든, 콩깍지 끝의 뽀송뽀송한 털까지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나의 목표입니다. 목표를 향한 끝없는 도전이 나의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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