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 사랑상 수상 작품 [복순씨의 르네상스]
조신한 가톨릭 신자였던 '치매 노모' 이야기
여성경제신문은 9월 28일부터 지난달까지 말 못할 응어리를 가슴 속에 안고 있는 치매 환자 돌봄 가족의 사연을 받았습니다. '해미'는 순우리말입니다. '바다에 낀 아주 짙은 안개'란 뜻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끼는 병을 뜻합니다. 어리석을 치와 매라는 부정적인 한자 뜻을 품은 치매 병명을 비유했습니다. 해미 백일장은 해미라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진 가족이 사연을 공유하면서 힐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습니다. 아래는 해미 사랑상(대상)을 수상한 경북 김천시에 거주하시는 이인숙 님의 사연입니다.

우리 엄마는 조신한 가톨릭 신자였다. 우리 집 아침 시간은 늘 평화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기도 음악과 함께했다. 엄마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냈다. 지금 우리 엄마는 트로트 뽕짝에 취해 몸을 흔드신다.
'르네상스'. 종교에서 이 단어는 개인에 집중한 시기를 일컫는다. 신에 대한 복종보다 나의 실존을 쫓는 시기.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드러낸 노래의 시대를 르네상스라고 한다.
복순 씨는 '나는 노래가 좋아'라며 신나게 몸을 흔든다. 머리맡에 둔 CD플레이어로 뽕짝을 크게 틀어 놓는다. 텔레비전에서는 평화방송 가톨릭 채널이 켜져 있는데 신부님의 강의가 뽕짝에 묻혀 입만 벙긋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뽕짝은 초인종 소리를 묻어버리고 전화 울리는 소리도 삼킨다. 자식이 들어와 엄마를 부르는 소리도 가볍게 흡수한다.
신나는 뽕짝과 함께 혼자서 민화투를 치고 있는 복순 씨는 요즘 오롯이 자신만의 르네상스 시기를 보내고 있다 복순 씨는 평생을 기도로 아침을 열고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며 살았다. 집안에는 늘 평화방송이 조용하게 흘러나왔다 복순 씨는 가르멜 수녀원에서 오랫동안 기도 활동을 해왔다. 때문에 기도의 폭이 넓었다.
요즘 복순 씨의 기도는 약식 시간 (1시간 걸렸던 기도가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으로 바뀌었다. 자식들에 대한 걱정에서도 온전히 벗어났다. 사실 복순 씨가 이 좋은 뽕짝 노래의 시대를 맞이한 것은 신의 뜻이다. 복순 씨는 오래전 기도 중에 신으로부터 '너도 이럴 때가 온다'라는 예지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축복받은 복순 씨는 기뻤다. 신이 당신의 기도를 꼭 들어 주신다고 믿었다. 딸의 입장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해봤다. 신이 복순 씨에게 축복한 ‘이럴 때'가 현재의 상태라면 신은 너무 잔인하다. 복순 씨의 이럴 때는 당신이 일을 그만두고 약 2년 정도 신나게 놀았던 때라고 생각한다.
여성회관에 노래를 배우러 다니고 시니어 동아리에서 하얀 옷을 입고 봉사 공연을 다니던 때였다. 그때 그 2년이 당신 평생에서 가장 즐겁고 편안한 시간이었을 것. 복순 씨가 이럴 때를 즐겁게 보내는 동안 그녀는 건망증과 치매의 중간 단계를 거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신이 예지한 이럴 때가 설마 육신은 늙어 황폐해지고 이성은 지난한 여정을 빠르게 삭제하고 있는 때를 의미한 것이었을까?
노쇠해진 육체는 복순 씨를 지속해서 괴롭히고 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가려움증은 복순 씨의 이성을 더욱 교란한다. 잠도 훔쳐 간다. 헐거워진 방광은 소변을 담아 두지 못하고 실수한다. 옆구리가 아파 종이 세제를 파스로 오인하고 붙여서 염증을 유발하고 눈두덩에 있던 점을 손톱으로 파내어 피를 낸다.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찬다.
복순 씨는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왜 이리 오래 살려 두는지 몰라'라며 쿠마의 무녀처럼 말한다.

정말 무서운 건 과거의 기억이 빠르게 지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복순 씨에게 과거의 기억은 단말마로 수면 위로 잠깐 떠오르다 곧바로 가라앉는다. 이미 50년 전에 죽은 당신의 언니가 어떻게 사는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한다. 30년 전에 죽은 시어머니가 어떻게 사는지 한번 가봐야 한다고 성화다. 자식들과 손주들을 연결하지 못한다.
평생 살았던 도시가 낯설어 혼자서 시장이나 단골 한의원도 찾아가지 못한다. 집 현관문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밤늦도록 집에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다. 이성이 삭제되어 가는 자리에 망각이 주인처럼 자리를 틀고 앉아서 질서를 바로잡을 생각에 이러는 것일까?
기억이 지워지는 만큼 복순 씨는 지금 당장 당신의 몸이 원하는 것에 침착(沈着)한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파 밥을 더 달라고 소리친다. 음식을 보면 게걸스럽게 먹
는다. 병에 들어 있는 건 그것이 무엇이든 마시려 든다. 단체 목욕을 하는 날엔 당신이 보기에 예쁜 남의 옷을 입는다. 공원을 한 바퀴 돌 때 들을 거라며 노래 나오는 핸드폰을 사달라고 조른다.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공원에 심어놓은 꽃을 뿌리째 뽑아 와 플라스틱병에 담아 성모상 앞에 둔다. 심지어 복순 씨는 시간과 공간 개념도 지우고 있다. 아침·점심·저녁을 인지하지 못한다. 밥을 먹고 돌아서면 점심을 먹었는지 저녁을 먹었는지 묻는다. 바다를 보고 와도 어디를 갔다 왔는지 담아 두지 못한다.
이런 복순 씨가 꼭 붙잡고 있는 게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성호를 긋고 남편의 이름 ‘이종수 살레시오와 함께'라는 기도를 하는 것.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와 율동 몇 가지 그리고 집에 들어서면서 ‘성모님 잘 다녀왔습니다'라고 하는 것. 외출 후 안방으로 들어가 CD플레이어를 누르고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켜서 48번 노래 채널을 트는 일이다.
뽕짝과 트로트가 뒤섞여 방안이 쿵쾅거린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앉아서 음악을 듣고 눈은 현란한 텔레비전 화면을 본다. 한여름에 보일러를 최고 온도로 올려놓은 채 에어컨을 켜고 선풍기를 돌린다. 평생 맨몸을 보이지 않았던 복순 씨는 수치심도 사라져서 발가벗은 채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이제 복순 씨에게 타인은 없고 오로지 이기적인 당신 자신만 있다. 그렇게 복순 씨의 르네상스 시기가 길어질수록 당신 자녀의 불안은 깊어지고 복순 씨의 안전을 위해 전전긍긍한다.
아들과 딸은 복순 씨의 이상행동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으로 가끔씩 말다툼을 한다. 아들은 정신 나간 어머니가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다. 딸은 어머니의 이상행동을 관찰해서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하려고 노력한다. 매일 새로운 사건을 창조하는 복순 씨의 위험한 행동을 해석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데 몸과 마음이 지쳐간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복순 씨가 지금이라도 자신만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평생 자신의 노래를 불러보지 못했던 삶이었다. 늘 양보하고 배려하고 봉사하던 삶에서 이제는 오롯이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삶. 어찌 보면 신이 축복한 이럴 때가 이성이 사라지는 지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 된 입장으로서 복순 씨가 종일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노래만 듣고 보다가 리모컨 돌릴 힘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서 존재하는 일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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