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안심센터 이용수기 공모전 장려작]

국제 변호사로서 열심히 주어진 일을 해왔던 남편은 마지막 직장이라는 마음으로 서해가 가까운 유서 깊은 한 도시에 있는 대학의 로스쿨 교수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중이었습니다. 남편을 따라 내려온 나는 그저 그렇게 생활이 조금 단조롭긴 해도 괜찮았습니다. 겉으론 모든 게 순조로운 듯 보였지만 50대 중반의 남편은 점점 기억력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변호 일을 하면서 받았던 스트레스로 힘들고 간혹 심혈을 기울여 진행하던 소송사건에 이기고 질 때마다 알게 모르게 뇌세포는 충격을 받았던 탓일까요···. 설마 병은 아니겠지 했던 남편은 5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퇴행성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말았습니다. 몇 년간 교직 생활을 지속했으나 수많은 기억력의 오류와 갑작스러운 인지능력의 부적응으로 교수직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왔고 하던 일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집에 머물게 되면서 남편의 사라져가는 기억력의 회복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이 진행을 늦춘다는 약에만 의존하고 있어 답답하고 막연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친정을 오고 가던 버스 속에서 어느 골목 어귀에 성동구 치매지원센터라는 조그만 팻말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당시의 치매지원센터가 지금은 치매안심센터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늘 오고 갈 때마다 궁금했지만 선뜻 들어갈 용기는 없던 차에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남편을 보기가 힘들던 어느 날, 용기를 내서 성동구 치매안심센터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2012년 성동구 치매안심센터에서 남편의 상태를 확인하고 여러 서비스에 대해 상담 후 남편은 기억키움학교에 들어가서 인지와 체력 증진 활동 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남편은 약물치료와 기억키움학교의 교육을 병행하니 더 나빠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안에서는 볼펜과 수첩을 기본으로 자질구레한 본인의 물건들을 모아 침대 위에 늘어놓는다든지 내가 본인 지갑에 채워 넣어 준 돈을 본인이 감추었다가, 본인이 찾아내어 놓고 하는 행동은 종종 있었지만 크게 불편하게 하지 않고 조용하게 행동하고 다니고 주위 사람을 의심하거나 하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증상은 보이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생활은 다행히도 평화로웠습니다.

남편의 인지에 자극을 주고 남편과 교감을 할 수 있는 놀이가 없을까 생각하던 중에 적당한 공을 찾아내어 서로 4~5m를 사이에 두고 던지기 놀이를 하였습니다.

그 공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었는데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적당한 무게감도 있어서 좋았고 거실에서는 물론 갖고 다니다가 산책 중에도 건물 안에서도 공간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었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운동이었습니다.

기억을 잃어가고 어떤 일에는 간혹 실수할 때도 있지만 나와 공을 던지면서 어떤 때는 나에게 강속구나 변화구도 마구 던져주는 모습을 보며 남편이 젊은 시절 운동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고 체력은 다행히 저하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건강하게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 병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추억을 만들기 위해 의사가 동행하는 산악 트래킹 프로그램이 있어 히말라야 4000m 고지를 오르는 안나푸르나 남봉 여행에 남편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여행 중 몇 번이나 남편이 일행 주변에서 사라져 눈앞이 캄캄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찾아다닌 끝에 주변의 도움으로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여행 일정 내내 남편과 잘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던 3일간의 히말라야 등반 여정을 남편은 비교적 순조롭게 해냈는데 도리어 내가 다리에 쥐가 심하게 나서 의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트래킹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떠올려 봅니다. 세계의 오래된 고봉들이 흰 눈을 이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푼 힐 전망대에서 직접 해돋이를 볼 때의 그 장엄한 광경이 펼쳐지는 그때 그 벅차오르던 감정을···. 지금은 와상으로 누워있는 남편도 ‘아! 그때 그 히말라야 산은 너무 멋진 곳이었어!’ 하고 감탄을 하고 있을까요?

또 딸이 중동에 있어서 딸을 보러 가는 아부다비 공항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딸 보러 얼른 가자며 재촉하던 남편의 모습들···. 남편의 느낌은 알 수 없지만, 나에게 남편과 함께한 여행은 매 순간 기억할 수 있는 한 소중한 추억이니까요, 나에게 만이라도···.

평소에 남편은 지병도 없었고 감기도 몇 번 걸렸던 적이 없을 정도로 체력에는 이상이 없어 성격이 늘 긍정적이고 밝았으며 걸음걸이도 좋았습니다.

마음이 그러하니 얼굴이 편안하여 발병하고 9년이 되도록 말을 시켜보지 않은 사람들은 치매로 아픈 환자인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태로 몇 년을 기억키움학교에 다닐 수 있었는데 만약 집에만 있었다면 수년을 그렇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처음엔 남편이 기억키움학교에 수업하러 들어가면 나는 그 입구를 무료하게 앉아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곳에 앉아 있던 나에게 치매 가족들의 힐링 프로그램을 권유받아 우쿨렐레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쿨렐레는 바이올린의 우아함도 기타의 웅장함도 갖추지 못한 자그마한 하와이의 민간 악기이지만 치매 예방에는 딱 좋은 악기 같았습니다. 우리 나이에 아주 안성맞춤인 악기로 수업시간은 몸과 마음이 깨어나서 일상에서 환자와 보내면서 지치고 아픈 마음을 씻어 주었습니다.

모두가 익숙한 노래들 ‘퐁당퐁당’이나 ‘오빠 생각’을 배울 때는 초등학교의 정경이 떠올랐고 ‘고향 생각’이나 ‘메기의 추억’을 배울 때는 여고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또 ‘연가’나 ‘조개껍질 묶어’를 배울 때는 대학 시절에 가졌던 캠프파이어의 장면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어떤 노래를 시작하셔도 모르는 노래 없이 다 따라 할 수 있어서 우리의 젊은 시절이 정서적으로 풍요로웠음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게 배운 우쿨렐레는 그해 크리스마스 즈음 기억키움학교의 남편을 포함한 어르신들과 센터 선생님들 앞에서 발표회를 시작으로 인근 데이케어센터도 방문하여 미니 발표회 등 작은 공연을 소소하게 참여하였습니다.

그중 잊을 수 없는 무대는 서울시치매안심센터들이 모여 진행된 치매 극복의 날에 서울시청 강당에서 진행되는 공연 무대에 예쁜 연주복을 차려입고 우쿨렐레 연주를 했을 때와 성동구청에서 진행된 치매 극복의 날 행사에도 치매 가족들과 같이 즐기고 우쿨렐레 연주발표를 하는 대규모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큰 무대에 서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설레는 공연이었고 다른 팀들의 연주도 볼 수 있어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치매안심센터의 가족 담당자와 우쿨렐레를 함께하는 우리 일행들의 계획은 여러 어르신들이 계신 곳이나 병원을 찾아가 우쿨렐레 연주발표로 그분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로 결정하며 꿈은 가득했지만,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모든 모임이 제한된 상태가 되었고 수업은 온라인으로 전환되어 계속해 왔으나 그것도 이제 마지막 수업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코로나 19가 장기간 계속되면서 우울하고 지친 성동구치매안심센터의 치매 가족들을 위해 서울숲에서 정원을 꾸미는 ‘느슨한 가드닝’이라는 힐링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6월 첫날 ‘느슨한 가드닝’ 팀에서 지급된 정원 모자와 앞치마, 꽃무늬의 정원용 장갑 등을 받아들고 나는 동화 속의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된 듯한 설렘이 있어서 집으로 돌아와 정원 모자에다 작은 꽃을 만들어 달아주었습니다.

서울숲에서 제공해준 나비 정원에서 원예 전문가 선생님들과 식물을 심는 전반적인 가드닝 방법을 배우고 서울숲의 아름다운 꽃들을 감상하고 다양한 향의 식물과 나비 정원에서 솎아 온 꽃들이 우리 집의 화병에 담겨 집안 분위기를 화사하게 빛내 주었습니다.

선생님 설명에 따라 우리가 손수 심어놓고 매주 수요일에 가면 어느새 꽃이 피어 우리를 반겨주는 기쁨은 정말 잊을 수 없습니다. 7월 3일 토요일 주말에는 환자와 가족이 다 참여하는 ‘썸머 팜 파티’를 가졌는데 그날은 예쁜 꽃이 담긴 작은 화병이 놓인 숲속 테이블에 앉아 모양도 예쁘고 맛도 좋은 칵테일도 즐기며 딸과 아름다운 추억 사진도 찍었습니다.

성동구의 치매안심센터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며 함께하는 치매 가족들과 서로 울고 웃으면서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남편의 병은 10년이 지나면서 어느 날부터인가는 심한 경련이 발생하였습니다. 병원 검사에서는 원인 불명으로 의사는 약의 장기 복용으로 올 수도 있다고 했지만 한 번씩 경련이 올 때마다 남편의 몸은 극명하게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와상 상태가 되었고 24시간 종일 쉼 없는 나의 간호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면서 집에서 정서적으로 남편과 나를 다스릴 수 있는 방편을 생각하다가 남편에겐 클래식 음악을 항상 들려주고 나는 옆에서 만다라의 컬러링을 시작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사물의 컬러링보다 만다라의 컬러링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사물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색이 있으므로 표현을 하는데 제약이 있고 신경을 써야 하지만 만다라는 자유롭게 아무 생각 없이 24가지 색연필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색칠을 하면 그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소한 취미생활을 조금씩 가지면서 위안을 가질 즈음 남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남편은 현재 우리 가족 곁을 떠나 장기요양등급 1등급의 중환자로 요양병원에서 치료 중입니다.

코로나 19로 감염 위험성이 높아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남편의 건강이 하루하루 좋아지길 바라며 면회가 허락되는 날이 오면 우리 딸들이 들려주던 우리 가족의 최애곡인 ‘섬집아기’와 내가 들려주는‘주모경’을 기억하고 내가 그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웃어주는 남편이 되었으면 하고 소원합니다.

나와 맞잡은 손에 남편이 힘을 주어 그동안 당신 고생했어 하며 남편이 우리에게 마음을 표현해 주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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