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안심센터 이용수기 공모전 최우수작]

‘어서오세요~ 소중한 기억을 지킬 수 있도록 따뜻한 국화차 나왔습니다.’
나는 매주 화요일 인지수업 학생에서 목요일이면 치매안심센터 기억다방의 바리스타로 변신한다. 유니폼을 입고 커피머신에 물을 채우고 음료 재료와 용기를 준비하는 것으로 바리스타의 하루를 시작한다.
알맹이가 있는 오미자, 나무토막 같은 모과차, 말린 꽃잎의 국화차, 주문 실수를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매뉴얼을 연구하지만 가끔은 음료를 주문하신 분이 말을 건네면 방금 하려던 음료 제조 방법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조금은 어설픈 바리스타이지만 치매안심센터에서 봉사하는 이 시간은 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목소리로 사람들과 시간을 나눈다.
하루는 젊은 청년이 치매안심센터를 서성였다. 먼저 다가가 어떻게 방문했는지 말을 걸었다. 청년은 어색해하며 할머니가 알츠하이머라고 하였다. 청년의 모습에서 할머니를 간호했던 나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
내 나이 12살, 50여년 전 나는 12살짜리 간병인의 삶을 살았다. 그 시절에는 세탁기나 기저귀, 고무장갑이 있던 때가 아니라 할머니가 대소변을 실수하면 매일 우물가에 들고 가서 옷과 이불빨래를 해야만 했다. 12살의 작고 어린 손은 얼어서 갈라지고 피가 났다. 실수한 옷을 갈아입혀야 하는데 옷을 안 벗으시려고 실랑이를 벌이면 어린 마음에 힘들고 서러워 울기도 했다.
열심히 간호해도 할머니는 점점 나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셨고 여러 치매 증상을 보이는 할머니의 임종 모습을 어린 나이에 지켜봐야 했다. 지금 치매를 앓으셨더라면 치매안심센터에서 검사도 무료로 받고 치료하고, 기저귀도 지원받으며 돌볼 수 있었을 텐데···. 기억력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공부도 할 수 있으니 그렇게 급격히 나빠지진 않았을 텐데···.
그 청년은 비록 12살 때의 나처럼 할머니를 직접 돌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옆에서 할머니와 가족들이 겪는 이 상황이 쉽지 않으리라 짐작되었다. 치매안심센터에서 상담을 받는다면 나와 같은 고충은 줄어들 수 있을 것 같아 그 청년과 한참동안 나의 경험담을 나누었다.
몇 달 간 봉사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났는데 그중 일부 사람들은 치매안심센터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기도 하였다. 치매가 아닌데 왜 자꾸 치매검사를 받아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시는 분들이 가끔 계신다. 그분들에게 음료 한 잔을 내어드리면서 60세에 이곳을 이용하고 좋아진 나의 경험담을 건네면 어느새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자주 오겠다고 말씀하시며 집으로 향하신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활기차게 지낼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과거 나는 몸도 마음도 황폐했고 우울과 대인기피로 수년간 집에만 머물러 있었다. 병원을 찾아가는 길에 우연히 치매안심센터 홍보물을 받고 치매검사를 상담하게 되었는데 검사 결과 경도인지장애라고 하였다. 나에게는 마음을 비우는 노력, 기억을 지키는 방법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을 가는 게 위축되고 두려웠지만 치매안심센터에서 권유한 인지수업에 참여하기 위해 집 밖을 나서기 시작했다. 인지수업을 듣는 분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라 막내 학생이 된 것 같아 편안했고, 작업치료 선생님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가끔은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고 건강문제로 결석하는 날들도 생겼지만 그런 세월 속에서도 조금씩 다져지고 건강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작업치료에 매료되어 치매안심센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 되었다.
여느 때와 같이 인지수업을 들으러 간 어느 날, “어머니 봉사활동 하실 수 있으세요?”
인지수업이 없는 날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네~ 그럼요!”
무슨 봉사활동인지 묻지도 않고 바로 대답이 나와 버렸다. 치매안심센터에서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의미 있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용기가 생겼다.
자원봉사는 치매안심센터를 찾아오는 분들을 위해 기억다방을 운영하는 활동이었다. 첫 활동 날 바리스타 교육을 받고 실수할까 봐 심장도 떨리고 손도 떨리고 긴장한 하루를 겨우 보내고 매주 활동하다 보니 어느새 내 안의 두려움, 우울, 죽음에 대한 연민은 잊은 채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친절하게 다가와 도와주는 선생님들, 나의 일상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많은 분들의 말씀과 마음 씀씀이에 나는 이곳에서 웃을 수 있다. 지워지고 흐릿해져 가는 기억 속에서 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시간이 거듭될수록 나의 마음은 더 단단해져 가고 성장하는 것을 느끼며 일상에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들이 있어서, 내 이야기가 필요한 이들이 있어서, 나는 이곳이 좋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과, 따뜻한 기억을 나눌 수 있는 이곳이 참 좋다. 과거의 나처럼 치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는 누군가에게, 굳게 닫혀있던 나의 마음을 조금씩, 조용히, 천천히 열어준 이곳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