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재의 국제금융 인사이트]
러시아, 스위프트 퇴출로 원유·천연가스 수출에 막대한 장애발생
한편 중국과 러시아 중심 신냉전 격화와 인플레이션 고착화 우려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작은 섬에 칠레의 유명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찾아온다. 정치적 망명을 한 것이다. 이 섬의 우체부인 마리오는 네루다의 시집을 읽으면서 차츰 시심(詩心)을 가꾸게 되고 꿈에 그리던 사랑도 이루게 된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격렬하게 충돌하던 혼돈의 1940년대 후에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는 네루다는 고뇌를 가득 안고 고독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그런 네루다와 한 우체부와의 만남과 우정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낡은 자전거에 우편 가방을 매달고 시골길을 달려가는 우체부는 정겨움과 그리움의 대상이다. 때때로 기억 속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소담하게 눈 내린 길을 우체부가 달려오는데 거기에 자녀가 부친 편지와 더불어 한 장의 우편환(換)이 같이 있다면 참으로 훈훈할 것이다.
과거 은행 간 전자이체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우편환은 떨어져 있는 친지 사이에 송금하고 정을 나누던 거의 유일한 도구였다. 전국 어디에나 있는 우체국에 가서 현금을 주고 우편환을 사서 편지 봉투에 넣어 보내면 수신인은 그 우편환을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한편, 온라인 뱅킹을 통해 전자이체를 하면 문제가 다소 복잡해진다. 10만원을 내 계좌가 있는 A은행에서 B은행에 있는 친구의 계좌로 이체한다고 하자. 은행 홈페이지에 로그인하고 간단한 입력과 클릭으로 이체는 완료된다. 10만원이 빛의 속도로 A은행에서 B은행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어디에도 현금 10만원의 실물이 실제로 두 은행 간에 전달된 흔적은 없다. A은행 계좌의 숫자가 10만원만큼 줄어들고 B은행 계좌의 숫자가 그만큼 늘어났을 뿐이다. 누구도 A은행에서 10만원을 받아 B은행으로 배달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동한 것은 현금이 아니라 송금을 지시한 메시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B은행은 친구의 계좌로 10만원을 주라는 A은행의 요청을 즉시 이행한 것일까? B은행은 사후 A은행이 10만원을 실제로 가져다줄 것이라고 신뢰했기 때문이다. 실제 당일 영업이 종료된 후 두 은행은 주고받은 돈을 합산한 뒤 그 차액을 정산한다.
돈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이제 A은행에 있는 10만원을 달러로 바꿔 미국 U은행에 계좌가 있는 친지에게 보내려 해 보자. A은행은 10만원을 100달러로 환전해 A은행의 달러 계좌가 있는 미국 S은행에게 100달러를 U은행에 송금토록 지시한다.
미국 S은행은 이 지시에 따라 100달러를 미국 U은행에 이체한다. 이 경우에도 실제 100달러 지폐가 국경을 넘어 이동하지는 않는다. A은행이 보낸 메시지에 따라 숫자가 바뀔 뿐이다. 그것은 S은행이 A은행을 신뢰하고 U은행이 S은행을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국제 간 통화 이체에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미국 U은행과 S은행 간에도 국내 은행과 마찬가지로 사후 정산이 필요하다. 미국 은행 간 정산은 대개 연방준비은행(연은)에 있는 두 은행의 지불준비금(지준) 계좌나 ‘연준 결제망(Fedwire)’을 통한 이체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미국 정부는 바로 이 연은을 통한 자금 이동을 감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가 간 외환의 결제는 스위프트(SWIFT, 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라 불리는 국제은행 간 통신망을 통해 이루어진다. 전 세계 200여 국가의 1만 1000개가 넘는 은행들이 이 결제망에 가입해 있다. 하루 처리 건수가 100억 건에 달한다.

지난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자 미국과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 정부가 러시아 주요 은행들을 스위프트 시스템에서 퇴출키로 했다. 각국 언론은 이 결정을 러시아 중앙은행의 해외 보유 자산에 대한 동결과 더불어 금융 핵폭탄에 비유했다.
그런데 이 스위프트 시스템도 이체를 지시한 메시지를 전송할 뿐, 실제로 현금을 실어 나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러시아 은행의 스위프트 퇴출이 핵옵션으로 불리는 것일까? 그것은 비록 스위프트 시스템이 은행 간에 메시지만 전송할 뿐이지만, 그 메시지를 주고받는 은행 간에 상호 신뢰가 담보되어 있어 실제 자금 이동과 같은 효과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세계 1위의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국인 러시아는 자국의 290개가 넘는 스위프트 가맹 은행을 통해 연간 8000억 달러 상당의 외환을 결제해 왔다. 이는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러시아 주요 은행이 스위프트 결제망에서 퇴출당하면 신속한 자금이체가 불가능해져 주요 수입원인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에 막대한 장애가 발생하게 된다.
한편, 스위프트는 은행 간 자율 협정에 기반하지만 각 은행은 최종적으로 자국 중앙은행에 있는 자신들의 지준 계좌를 통해 사후정산을 한다. 따라서 각국 정부는 어느 은행이 자신이 내린 결정에 위반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미국 재무부는 연준 결제망을 들여다봄으로써 은행의 자금이동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국제 결제에서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80%가 넘는다. 유로의 비중은 6% 상당이다. 러시아 은행들이 미국과 유럽 정부가 통제하는 스위프트를 우회하여 다른 통화로 원유와 천연가스 매각 대금을 받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그런데 스위프트가 메시지 전송 시스템에 불과하다면 이를 대체할 다른 전송망을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실제로 스위프트를 제외하고 몇몇 국제 이체 전송망이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국제 이체 시스템이 효과를 가지려면 가맹 은행이 광범위해야 하고 상호 간에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메시지 전달이 신속하고 보안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중국이나 러시아가 주도하는 전송망에 서방 민주진영의 은행들이 가입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스위프트 제재가 가져올 부작용도 만만찮다. 당장 원유가가 급등해 인플레이션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1970년대 오일 쇼크로 겪었던 두 자릿수의 물가 상승과 뒤이은 경기침체 그리고 스태그플레이션이 현실화할 우려가 점증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달러 패권에 대한 반발이 표면화하면서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비서방 결제 동맹이 맺어지고 신냉전이 격화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될 경우 두 진영이 각기 다른 길을 걸으면서 국방비 지출이 증가하고 국지적 분쟁의 가능성이 더 커질 수 있다.
그럼에도 미국과 EU가 러시아의 스위프트 퇴출이라는 초강수를 둔 이유는 명백하다. 푸틴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젤렌스키 정부를 전복시키고 우크라이나를 독재의 하수인으로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스위프트 퇴출 결정은 자유와 민주를 지키려는 서방 진영 단합의 이정표이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성재 가드너웹대학교 경영학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