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웅익의 건축 마실]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인구 소멸 지역 활성화 대책

그동안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의하면서 수강하시는 분들의 반응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이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대략 십여 년 전까지는 전원주택이 화두였다. 당시 퇴직을 앞둔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퇴직 후 전원주택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공간은 답답하고 시간은 늘 부족한 도시에서 평생 일만 하고 살았으니 퇴직하고 나서는 확 트인 자연 속에서 느긋하게 살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나도 서울 인근에서 전원생활을 해볼까 하고 답사를 다니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걱정으로 망설이다가 결국 포기했다.
요즈음 강의하면서 전원주택에 대해 질문하면 손사래를 치는 사람이 많다. 지방으로 가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 의료시설 부족을 첫 번째 이유로 든다.
그동안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주로 토목 사업에만 투자했다. 도로를 만들고 철도를 놓고 강을 파헤쳤다. 그러나 정작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인프라는 방치 수준이다. 대부분 지방에는 문화시설은 차치하고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지 않다. 가장 중요한 의료시설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작년 어느 날 저녁에 동해안 정동진역에서 서울행 KTX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동진역은 그 이름만으로도 정감이 간다. 파도가 밀려오는 밤바다의 정취에 한참 빠져 있다가 문득 멋진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얼른 사진을 찍으려고 승강장 휴게실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얼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잠시 후 코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흐르는 것 같아 손으로 훔쳤더니 선혈이 줄줄 흘러나왔다. 손수건으로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좀 어두운 상황에서 휴게실 출입문의 통유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투명유리라서 문이 없는 줄 알고 급히 들어가다가 유리문에 코를 세게 박은 것이었다. 그 순간 열차가 들어왔지만 심하게 다친 탓에 피가 줄줄 흘러 열차를 탈 수 없었다.

응급차가 올 때까지 역무실에서 대기했다. 한참 만에 응급차가 왔지만 정동진에는 병원이 없다고 하면서 강릉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피가 멎지 않았다. 문제는 강릉으로 가는 응급차 안에서 발생했다. 구급요원이 강릉에 있는 병원에 이러이러한 환자를 태우고 간다고 전화했는데 거절을 당했다. 강릉에 있는 큰 병원이 전부 다 거절했다.
구급요원도 그런 상황이 황당했던 모양이다. 나를 보면서 병원 반응이 이런 줄 몰랐다고 했다. 그때까지 피가 멈추지 않았으므로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결국 전화 승낙(?)을 받지 않고 어느 병원으로 무작정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응급실에 있던 의사가 구급요원에게 대놓고 싫은 소리를 했다. 미리 전화하고 와야지 그냥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의사가 구급요원에게 화를 내는 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으려니 화를 참기 힘들었지만 코피를 멈추어야 하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응급치료를 마친 의사는 밤에 발생하는 사태는 책임을 질 수 없으니 원주나 서울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결국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자정이 넘어 서울의 종합병원에 가서 치료를 마무리했다.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오는 동안 지방에서는 코를 깨는 정도로도 재수 없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런데 산골 오지도 아니고 강릉에서 당한 일이라 화를 삭이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해 7월 경제장관회의에서는 ‘시니어레지던스 활성화 방안’이라고 하면서 인구 소멸 지역에 분양형 실버타운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임대형 실버타운만 가능한 현행법 때문에 지방에서 실버타운이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런데 실버타운의 분양을 허용하면 인구 소멸 지역에서 투자가 활성화될 것이고 그에 따라 시니어들이 대거 이주할 것으로 판단하고 그걸 ‘활성화 방안’이라고 발표하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정동진에서 출혈 사고가 났는데 강릉에서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결국 한밤중에 서울까지 와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이다.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우리나라의 농어촌은 이미 그 자체로 실버타운이 된 지 오래되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인구 소멸 지역에 의료시설을 확충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방에 살고 있는 고령자에게도 꼭 필요하고 도시인들의 지방으로의 이주를 유도하는 가장 중요한 대안이 될 것이다.
여성경제신문 손웅익 건축사·수필가 wison777@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