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웅익의 건축마실]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는
품위 있게 나이 든 어른 같은 건축물들

구)샘터 사옥 /그림=손웅익
구)샘터 사옥 /그림=손웅익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마로니에 공원이 있다. 광장에는 거대한 은행나무도 있고 느티나무도 있는데 마로니에 나무의 생김새가 좀 이국적이기도 하고 그 발음이 좀 낭만적이라 마로니에 공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아닐까. 사계절 내내 활기가 넘치는 마로니에 공원은 답답한 도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

1975년에 서울대 문리대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이 일대가 개발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마로니에 공원 주변에는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이 많다. 우선 우리나라 1세대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의 작품인 구 서울문리대 본관은 현재 예술가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혜화동 로터리에는 이희태의 작품인 혜화동성당이 있고, 로터리에서 북쪽 좁은 길로 올라가다 보면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 두 개나 있다. 지금 왕성하게 활동하는 승효상의 작품도 몇 개 만날 수 있다.

마로니에 공원 일대가 개발되기 시작하던 시기는 마침 건축가 김수근이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서울에는 여기저기 수많은 김수근의 작품이 있다. 그중에 서울 중심부에는 세운상가, 서편으로는 남영동 대공분실, 벽산 125빌딩(게이트웨이 빌딩), 불광동 성당이 있다. 남산 중턱에 서 있는 자유센터, 타워호텔 (반얀트리 호텔), 장충동 길의 경동교회, 그리고 여기 마로니에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아르코 예술극장, 아르코 미술관, 샘터 사옥, 공간 사옥 (아라리오 뮤지엄)에 이르기까지 서울 동편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다.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고 했던 김수근은 마로니에 공원 주변을 온통 붉은 벽돌로 병풍을 쳐 놓았다. 직육면체의 건축 형태는 벽돌 벽을 여러 번 접어 깊게 들어간 창문으로 직육면체 외벽의 깊이와 중후함을 더했다. 그러한 디자인으로 자칫 너무 무거울 수 있는 파사드는 아르코 미술관 외벽처럼 자유로운 돌출 벽돌이 중화시켜 준다. 한 손으로 들기에 만만한 작은 벽돌이 김수근을 만나면서 건축 조형의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르코예술극장의 창 /그림=손웅익
아르코예술극장의 창 /그림=손웅익

아르코예술극장 옆에 샘터 사옥이 있다. 지상 4층의 작은 건물임에도 1층의 상당 면적을 공용 동선으로 할애했다. 전면도로뿐 아니라 뒤 도로와 옆 도로에서도 출입문을 통과하지 않고 자유로이 중앙 로비 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다. 외부 도로의 연장으로 디자인했고, 바닥재료도 도로의 분위기를 내는 사고석 깔기로 되어있다. 건축의 공익성이 잘 구현된 디자인이다.

예산의 문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1979년 샘터 사옥을 지을 당시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분명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다. 김수근의 제자인 승효상이 2012년에 샘터 사옥의 5층을 증축 설계하면서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고 한다. 5층을 증축했음에도 도로에서 쳐다보면 4층으로 보이는 것은 증축한 5층을 전면 외벽으로부터 뒤로 후퇴해서 앉혔기 때문이다. 증축 부를 뒤로 후퇴시킨 것과 증축 부의 재료를 통유리로 처리한 것은 기존 벽돌 벽과 대비시킨 자연스런 디자인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해설하는 ‘대학로 건축여행’의 출발점은 여기 샘터 사옥 5층이다. 전망이 좋은 5층 베란다에는 긴 목재의자가 있어서 건축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서로 인사도 나누고 여행 일정과 대학로에서 만나는 건축가와 건축물을 간단하게 소개하기에 안성맞춤의 공간이다.

그동안 여러 번 대학로 일대 건축을 해설했지만 매번 새로운 해설 일정을 앞두고 사전 답사를 한다. 며칠 전에도 사전 답사를 하느라고 샘터 사옥 앞에 서서 올려다보다가 문득 외벽에 붙어있던 ‘샘터’라는 큰 글씨가 '공공그라운드'로 바뀐 것을 발견했다. 작고 얇은 책 표지에 두꺼운 붓으로 쓴 투박하기도 하고 순박하기도 했던 그 글씨체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라 서점으로 향했다.

마침 4월 호 한 권이 서가에 남아있다. 표지디자인이 내가 기억하고 있던 이미지와 완전히 달라졌고 이름은 ‘샘터’에서 ‘SAMTOH'로 바뀌었다. 읽을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샘터’는 맑은 샘물처럼 나의 영혼을 적셔 주곤 했었다. 책을 넘기니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감정이 들어 즉석에서 1년 구독 신청을 했다.

이제 건축가는 다 떠나고 그들의 유품처럼 마로니에 공원 주변에 남아있는 건축물을 둘러본다. 이제 자유로운 젊은이들 같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대학로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건축가들의 작품을 마주하면 품위 있게 나이 든 어른을 만나는 것 같다.

여성경제신문 손웅익 건축사·수필가 wison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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