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웅익의 건축 마실]
급속히 변하는 비대면 세상에서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소통의 공간

동묘벼룩시장과 동묘 /그림=손웅익
동묘벼룩시장과 동묘 /그림=손웅익

오래전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인상 깊었던 것 중의 하나는 로마의 주말 구제시장이었다. 세상의 구제 상품을 다 모아 놓은 듯 거리를 꽉 채운 만물상도 인상적이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여행 온 관광 인파도 인상적이었다. 시장 복잡한 곳을 조금 벗어난 골목에 앉아 작은 보자기를 펴고 동전 몇 개씩을 팔고 있는 노인들이 있었다. 전부 로마 시대 동전이라고 했다.

진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동전에 관심을 보이는 이는 별로 없었다. 걱정스럽게 물었더니, 안내하는 분의 설명으로는 그 노인들이 동전을 팔 목적보다 벼룩시장이 열리는 도시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관광객들을 만나고 그 도시에 사는 친구도 만날 목적이 크다고 했다. 그때는 그 이야기가 그리 큰 울림으로 다가오지 않았었다.

지하철 1호선 동묘앞역에 내리면 동묘벼룩(구제)시장이 있다. 벼룩시장이 여기에 생기게 된 연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 일대 골목을 다 점유하고 있어 엄청난 규모다. 벼룩시장으로 들어가는 골목 옆에 동묘가 있다. 관우 장군의 사당인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중국의 요청으로 사당을 만들었다고 한다. 동묘라고도 하고 동관왕묘라고도 하는데 벼룩시장 시작 지점의 분위기로 딱 맞는 것 같다. 길을 따라 죽 진열된 구제품은 동묘 사당 지붕의 오래된 검은색 기와와 조형적인 돌담과 잘 어울린다.

골목을 걸으며 구제품을 구경하다 보면 도대체 이렇게 많고 다양한 상품은 어디서 다 구해왔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별의별 종류의 상품이 다 있다. '여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있다'는 말처럼 종류도 그렇지만 특별한 디자인의 물건이 워낙 많아서 갈 때마다 새롭고 보는 재미가 있다. 길을 걷다 보면 대부분의 고객이 어르신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건을 파는 분들도 그렇고 구제를 구경하는 분도 대부분 어르신이다.

추억을 담고 있는 골동품들 /그림=손웅익
추억을 담고 있는 골동품들 /그림=손웅익

어르신들은 다들 검은 비닐봉지를 한두 개씩 들고 다니신다. 물건 종류가 워낙 많고 가격도 저렴하므로 어르신들이 물건을 사는데도 별 부담이 없을 듯하다. 친구들과 같이 다니는 분들도 많다. 친구들과 만나서 구경하면서 시간 보내기도 좋을 뿐 아니라 대부분 오래된 물건들이라 자연스럽게 추억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몇 년 전에 강의차 의성에 간 적이 있다. 가는 날이 마침 장날이었다. 의성이라고 하면 마늘이 떠올라 의성 마늘도 구경할 겸 시장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늘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마늘 가게 주인에게 왜 이렇게 의성 장에 마늘이 적은지 물어보았더니, 요즘 누가 마늘 사러 시장에 오느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과거에는 장이 설 때면 몇십 리 밖에서도 마늘을 지고 와서 팔았다고 하는데 이제는 집에 앉아서 마늘을 사는 세상이 되어서 팔러 오는 사람도 없고 구경 오는 사람도 없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상인의 얼굴에 그늘이 살짝 지나갔다. 장사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일 텐데 과연 인터넷 세상임을 실감한다.

그러고 보니 장날의 설렘을 잊은 지 오래되었다. 대형 마트가 동네마다 점령해 버려 전통시장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집에서 무엇이든 주문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아마 머잖아 대형마트도 사라질지 모른다. 이제 대면 은행도 많이 사라지고 무인점포만 늘어난다. 열차표도 집에서 구입한다. 택시도 집에서 부르는데 목적지와 경로는 휴대폰으로 지정한다. 식당에서도 직원에게 주문하지 않고 키오스크를 보면서 주문한다. 게다가 배달 로봇이 음식을 날라다주는 식당도 많다.

지금 우리는 타협이 허용되지 않는 세상, 앱을 사용할 줄 모르면 택시 잡기도 힘든 세상, 키오스크와 친해지지 않으면 밥을 먹기도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문명화가 가속화되면서 사람 간의 대면과 대화가 필요 없는 비대면 세상으로 급속히 변하고 있다. 오래전 로마 벼룩시장에서 동전을 팔고 계시던 어르신들이 원했던 것처럼 흥정이 있고, 타협이 있고, 추억이 있는 동묘벼룩시장에 유난히 어르신들의 발길이 많은 이유가 아닐까.

여성경제신문 손웅익 건축사·수필가 wison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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