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웅익의 건축 마실]
무심히 지나치던 길에서 만난
서울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

이회영 기념관의 가을 /그림=손웅익
이회영 기념관의 가을 /그림=손웅익

시니어들과 두 시간가량 서울 여러 길을 걸으면서 건축과 역사 이야기를 나눈 지 몇 년이 되었다. 그동안 다녔던 길마다 특징이 있다. 우이신설선 삼양역 인근에 문을 연 지 50년이 넘은 황해이발관에서 시작해서 화계역 인근에 있는 삼양탕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골목길을 걷는다.

삼양탕도 문을 연 지 50년 정도 된 목욕탕이다. 삼양동 골목에는 작은 봉제공장도 많고 실이나 단추 전문 업체도 있다. 아직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골목을 걷다 보면 문설주에 주인장 이름을 돌에 새겨 문패를 걸어둔 집도 만날 수 있다.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출발해서 낙산 도성길을 넘어 창신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다. 낙산 정상에 서면 멀리 롯데월드타워도 보이고 DDP와 남산도 보인다. 고층 건물이 빽빽하게 자리 잡은 서울 도심과 아직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창신동이 대비되는 풍경은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보는 것 같다. 창신동 골목에도 작은 봉제공장이 많다. 과거 동대문 평화시장이 번창할 때 이 동네도 활기가 넘쳤을 것이다.

대학로는 건축과 조각 분야 거장들의 작품 전시장이다. 건축가로는 일제강점기의 건축가 박길룡으로부터 이희태, 김수근, 승효상, 이종호,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 있고, 김세중, 최만린의 조각작품을 만날 수 있다. 수많은 소극장에서는 일 년 내내 공연이 이어지고, 마로니에 공원은 언제나 활력이 넘친다.

김중업의 서산부인과의원(현재 아리움 사옥) /그림=손웅익
김중업의 서산부인과의원(현재 아리움 사옥) /그림=손웅익

3호선 동대입구역에 있는 태극당에서 출발해서 경동교회와 아리움 사옥을 거쳐 DDP까지 이어지는 장충단로는 이희태, 김정수, 김수근, 김중업, 자하 하디드 등 건축가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특히 김수근의 말년 작품인 경동교회 내부 공간에 서면 속세의 모든 상념이 사라진다. 김중업의 서산부인과의원은 여러 해 동안 디자인 회사인 아리움 사옥으로 사용되다가 최근에 통닭집으로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이다. 통닭집을 오픈하면 내부 공간을 볼 수 있겠다.

보신각에서 출발해서 YMCA와 삼일빌딩, 청계천을 거쳐 세운상가까지 이어지는 종로길에서는 과거의 서울 모습이 급격히 지워지는 현장을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에 서울에서 가장 높았던 삼일빌딩은 최근에 리모델링을 마쳤다. 이제 서울에서 그리 높은 건물은 아니지만 그 명성을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청계천의 변신은 가히 놀랍다. 시니어들과 청계천을 걷다 보면 너도나도 삼일고가도로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한다. 세운상가는 시장이 바뀔 때마다 보존과 개발 사이에서 그 운명이 왔다 갔다 한다. 세운상가 인근 고층 건물 개발과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의 관계로 인해 요즘 논쟁이 한창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길은 정동길이다. 시청 맞은편 세실극장에서 출발해서 덕수궁 돌담길을 거쳐 고종의 길, 중명전, 정동제일교회,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경향신문 사옥, 경희궁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특히 일제강점기 비극적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길이다. 덕수궁의 대화재는 분명 일본인들의 소행일 것이다. 중명전에는 을사늑약의 현장을 밀랍 인형으로 재현해 두었다.

추운 겨울날 여장을 하고 경복궁의 서쪽 영추문을 빠져나온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까지 피신한 길을 고종의 길로 명명해 두었다. 같이 여행하는 중에 시니어 한 분이 고종의 명예로운 길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하기야 치욕의 길에 사람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별로 없지 않은가.

정동길이 끝나는 곳에 경희궁이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착공해서 열 명의 왕이 머문 유서 깊은 궁이다. 그 화려했던 궁이 일제 강점기에 남아있던 전각을 다 허물고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중학교를 세웠다.

지금은 경희궁으로 일부 복원되었지만 복원되기 전에 이 자리에 있었던 고등학교를 나도 3년간 다녔다. 정동길에서 일제 강점기의 비극적인 역사와 건축 이야기를 하다 보면 3시간으로도 부족하다.

최근에 경희궁에서 국립기상박물관, 홍난파가옥, 어네스트 베델 집터, 이회영 기념관, 권율장군 집터를 거쳐 앨버트 테일러의 딜쿠샤까지 이어지는 송월1길과 사직로2길 주변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여기도 일제강점기와 독립운동에 얽힌 감동과 가슴 시린 이야기가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었다.

권율 장군 집터에는 500년이 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권율 장군 이야기도 일본과 관련되어 있다. 얼마 전에 경희궁에서 딜쿠샤까지 여행하면서 역사를 해설하던 중에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일본인들에 대한 험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여성경제신문 손웅익 건축사·수필가 wison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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