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애라, ‘극동인민대표회의’ 한민족여성대표

여성경제신문∙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광복 75주년 기념 ‘오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 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외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중 열릴 예정이다.

권애라_김종도作 /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권애라_김종도作 /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권애라 權愛羅 (1897~1973)

운동계열 : 3.1운동   |   훈격(서훈년도): 애국장(1990)

경기도 개성 출신인 권애라 열사는 충교 예배당 내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월 1일 개성군 송도면의 독립만세운동시위를 주도했다. 80여 매의 독립선언문이 그녀의 손에서 어윤희 선생에게 넘어가고, 다시 주요 인사들에게 배부되면서 만세 시위가 시작됐다. 이 시위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에 관련된 일에 힘써왔는데, 1920년 4~5월 6회에 걸쳐 ‘반도의 희망’, ‘잘 살읍시다’ 등의 제목으로 여성의 애국 사상 고취를 위한 강연을 시도하다가 다시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한민족여성대표로 참가하여 당시 민족대표 여운형, 나용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상하이와 동삼성(현재 둥베이삼성)를 중심으로 여성 지위 향상과 함께 지하 항일운동을 했으며, 1942년 1년 이상 비밀감옥에서 고문 취조를 받은 뒤 징역 12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석방됐다.

"작업을 위한 자료 사진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흐릿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그럴 땐 사진을 몇 시간이고 가만히 들여다봤습니다. 캐리커처 작업을 오래 해서인지, 사진을 관찰하다 보면 그분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더라고요. 좀 더 사실적인 작업을 위해 해부학적으로 분석하기도 했고요. 당시 여성의 신분으로 남성 못지않게 활발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에 깊이 감동했고, 기억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움도 느꼈습니다. 초상화 작업을 통해 많은 여성독립운동가가 재조명되기를 희망합니다."  -김종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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