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소와 금융 인프라는 출발선부터 달라
매매 구조 갇혀 프로토콜 설계 권한 없어
스테이블코인·온체인 결제는 정산망 전쟁
한국형 '금융 AGI' 승자는 레일을 가진 자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페어몬트 앰버서더 호텔에서 열린 디지털자산 정책 콘퍼런스 '디콘(D-CON) 2025'에서 를 주제로 특별대담이 진행되고 있다. / 이상헌 기자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페어몬트 앰버서더 호텔에서 열린 디지털자산 정책 콘퍼런스 '디콘(D-CON) 2025'에서 를 주제로 특별대담이 진행되고 있다. / 이상헌 기자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가 ‘정산 인프라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코인베이스를 벤치마킹하려 하지만, 두 회사의 출발점과 핵심 구조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핀테크 인프라 기업으로 진화한 코인베이스는 이미 규제 체계 안에서 결제·정산 프로토콜을 직접 설계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춘 반면, 업비트는 시세 매매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산 권한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20일 핀테크 업계에 따르면 코인베이스가 최근 공개한 스테이블코인 기반 글로벌 결제 툴은 결제 단계를 넘어 정산·보관·프로토콜 운영까지 아우르는 모델이다. 기업은 USDC를 단일 계정에서 송금·결제·수취·이자 수령까지 처리할 수 있으며, 정산 지연이나 FX(환전) 리스크를 제거한 점이 특징이다. 결제 링크만 생성하면 1초 내 처리되는 구조는 사실상 ‘은행 역할’을 흡수한 형태다.

반면 업비트의 사업 모델은 여전히 거래소의 경계 안에 머문다. 고객 자산을 예치하고 코인을 사고파는 기능은 제공하지만, 결제망을 직접 운영할 수 있는 법적·기술적 기반이 없다. 결제 규제 체계 밖에서만 활동해야 하는 구조적 제약 때문에 코인베이스식 프로토콜 모델을 그대로 이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실정이다.

두나무가 21일 개최한 ‘업비트 디지털자산 정책 컨퍼런스 2025’에서도 한국 금융 인프라에 대한 구조적 문제가 제기됐다. 류혁선 카이스트 경영공학부 교수는 “기술보다 규제가 앞서는 정책 구조”를 지적하며 정부·법·업권 전체의 ‘정책 재정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블록체인·디지털 자산을 기존 금융의 부속물이 아닌 온체인 금융 인프라의 핵심 요소로 재해석하고, 토큰화 인프라·스테이블코인·온체인 결제망을 포괄하는 국가 단위 금융 아키텍처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공지능 시대의 언어로서 ‘재정렬(Realignment)’이란 단순히 규제 방향을 일부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금융 → 블록체인 순으로 배치돼 있던 정책·법·인프라의 우선순위를 블록체인·스테이블코인·온체인 정산망을 금융의 상위 계층으로 끌어올리는 구조적 전환을 의미한다.

즉, 디지털 자산을 기존 금융의 부속품으로 다루던 질서를 해체하고 국가 단위 결제·정산·감사 인프라를 온체인에서 재구성해 규제·기술·시장·리스크 프레임 전체를 새로운 축으로 다시 배치하는 작업이다. 단순 조정이 아니라 금융 인프라의 좌표계를 바꾸는 문제라는 뜻이다.

국내 거래소 구조의 한계도 분명히 지적됐다. 류 교수는 “한국의 거래소들은 시세 매매 중심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금융 인프라와 분리돼 있다”며 업비트가 코인베이스처럼 정산·결제 프로토콜을 설계할 수 없는 구조적 제약을 지목했다.

또한 “AI의 검증 불가능성과 블록체인의 투명성이 결합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두 기술의 보완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두 기술을 동일선상에서 통합하려는 시각보다는 서로 다른 층위의 기능이 맞물리는 구조적 분업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코인베이스의 사례가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인공지능은 ‘의미를 생성하는 엔진’이고, 블록체인은 ‘상태를 확정하는 엔진’인 만큼 두 기술의 결합은 수평적 융합이 아니라 수직적 연동이 적합하다. 글로벌 선도 모델은 이미 거래소 수준을 넘어 이 구조를 구현했다.

먼저 코인베이스는 미국 금융당국의 다중 라이선스를 기반으로 스테이블코인 USDC 공동 발행사로 참여하며 블록체인을 결제·정산 레이어로 재해석하는 금융 인프라 전략을 구체화해왔다. 회사는 “USDC와 같은 스테이블코인은 더 빠르고 개방적인 금융 레이어의 핵심”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이는 USDC를 ‘정산 레이어’로 규정한 명시적 선언이다.

이들의 스테이블코인 기반 즉시 정산 체계는 온체인 결제를 단순 결제수단이 아닌 ‘정산 구조’로 다루는 접근이다. 기업 계정 하나에서 송금·결제·수취·이자까지 통합되는 구조로, 블록체인은 ‘검증·정산 엔진’, AI는 사용자의 의도를 해석해 트랜잭션을 구성하는 ‘의사결정 엔진’으로 기능한다.

빅테크 전문가 사이에서 “코인베이스가 넘은 산은 거래소의 산이 아니라 금융 인프라의 산”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반면 업비트나 빗썸 등 국내 거래소는 매매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원화 예치금은 은행 신탁으로 관리되고 거래소는 어디까지나 ‘중개자’다. 따라서 ‘중개 → 은행 → 프로토콜’로 이어지는 10년짜리 진화 과정을 네이버파이낸셜과의 합병만으로 성취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코인베이스는 은행급 라이선스·준칙·정산망을 확보한 뒤 단계적으로 확장하며 금융 인프라의 일부로 편입됐다. 이날 컨퍼런스에서 강형구 한양대 교수는 네이버–업비트 결합이 혁신의 촉매가 될 수 있다며 한국은행의 신중한 태도를 우회적으로 비판했지만 스테이블코인은 기술적 잠재력과 별개로 발행·정산·리스크 관리가 모두 통화정책의 핵심축과 맞물리는 영역이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보수적 태도를 단순한 ‘속도 문제’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2025년 6월 5일 미국 뉴욕시의 서클 인터넷 그룹(Circle Internet Group) IPO 당일 뉴욕 증권거래소(NYSE)에서 트레이더들이 작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025년 6월 5일 미국 뉴욕시의 서클 인터넷 그룹(Circle Internet Group) IPO 당일 뉴욕 증권거래소(NYSE)에서 트레이더들이 작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박정호 한양대 테크노아트대학원 교수가 금산분리 문제를 주장하는 논리도 금융권에 비해 빈약한 인프라 현실과 맞닿아 있다. 금산분리는 ‘전통적 은행기능 약화→비은행으로의 자금 이동 확대→빅테크 영향력 증대’라는 일방적 위험 경로를 가정하지만 실제 금융은 이미 스테이블코인 결제, 빅테크 페이먼트, 자본시장과 예금의 교차 이동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혼합 구조로 전개되고 있다.

은행이 ‘수신 기반 안정성’만으로 안전하다는 가정이 무너진 상황에서 금산분리는 더 이상 시스템 리스크를 줄이는 장치가 될 수 없고 오히려 금융·산업 간 통합적 혁신을 막아 새로운 경쟁력을 봉쇄하는 규제 장벽으로 기능한다는 지적이다.

국내 금융권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의가 본격화할수록 카카오, 시중은행, 카드사 등 결제·정산 인프라 사업자의 영향력이 강화될 전망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법적 지급수단이 아니라 ‘정산형 디지털 머니’이기 때문에 지급결제망과 리스크 관리 구조를 갖춘 사업자가 프로토콜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AI가 결제 의사결정 일부를 담당하는 ACP(Agentic Commerce Protocol) 시대가 열리면서 정산망을 가진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카카오페이·페이팔·코인베이스는 이 흐름을 선제적으로 읽고 ‘정산 프로토콜 → AI 판단 계층 → 실시간 결제’ 구조를 이미 구축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권 한 전문가는 여성경제신문에 “네이버와 업비트가 벤치마킹해야 할 방향은 코인베이스의 ‘프로토콜’ 자체가 아니라 결제망 사업자와의 전략적 제휴”라며 독자적 정산을 꿈꾸기보다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생태계가 열릴 때 시중은행 및 핀테크 금융 앱과 API로 접속하는 형태가 현실적이라고 분석했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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