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한국적 서정을 영어로 풀어낸
세계적 소설가 김용익
그의 죽음 직전에 우연히 만나다

집 안의 책을 많이 정리했다. 특히 국내 소설은 거의 다 처분하고 인연이 있거나 큰 울림을 준 작가의 책 몇 권만 남겨두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햇살에 드러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김용익의 <꽃신>,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1995년 3월 초였다. 뉴욕에 체류 중이던 나는 JFK공항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오다가 한 노인을 만났다. 여든 살 정도로 짐작되는, 몹시 마르고 초췌한 백발의 노인, 낡은 검은색 가방을 품에 안고 어디가 아픈 듯 기운 없이 앉아 있었다. 웅웅거리는 듯한 공항 특유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겁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내게 한국 사람인지 조심스럽게 묻고 몇 가지 부탁을 했다. 오래되어 기억이 또렷하진 않지만, 항공사 카운터에 데려다 달라고 했던 것 같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상태로 보아 그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친절함이 배어나는 대화를 시작했고(그분은 안심한 표정으로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영어를 모른다고 생각해서 항공사 직원들과 통역도 해주고 직접 모시고 다니며 도와드렸다. 그는 무척 고마워했다. 한국에 가면 고려대에서 강의할 것이라고 했다. 이제 들어가시면 된다고, 조심해서 잘 가시라고 인사한 후 헤어졌다. 그러곤 잊어버렸다.

소위 '문학청년'을 자처했지만 김용익 작가를 전혀 몰랐다. 뒤늦게 그의 대표작 '꽃신'을 읽어보곤 한동안 어떤 깊은 느낌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박헌정
소위 '문학청년'을 자처했지만 김용익 작가를 전혀 몰랐다. 뒤늦게 그의 대표작 '꽃신'을 읽어보곤 한동안 어떤 깊은 느낌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박헌정

​나는 그해 6월에 한국에 돌아왔다. 어느 날, 신문에서 익숙하지는 않지만 기억나지 않을 수 없는 얼굴을 발견했다. 그 노인, <꽃신(The Wedding Shoes)>이라는 작품을 남긴 세계적인 소설가 김용익 선생이 몇십 년 만에 귀국해 고려대에서 아주 짧은 기간 강의하다가 4월 11일, 지병인 심장병으로 타계했다는 기사였다. 나는 국문학을 전공했고 소설도 꽤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 후 교과서에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는데 당시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920년 통영의 세력가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자유롭고 순수하게 살다 간, 약간 기인 같은 인물이었다. 60~70년대에 외무부 장관을 두 번이나 지낸 김용식 장관의 동생이기도 했다. 물욕 없이 문학만을 꿈꾸던 비현실적이고 비사교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1948년에 처음 도미하여 미국대학에서 영문학과 교수로, 소설가로 크게 인정받았다. 감히 내가 그런 인물을 대신해서 통역을 해주었다니! 얼마 안 남은 생을 예감한 채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고국을 향하던 길이었던가 보다.

그의 면모를 알만한 재미있는 글이 있었다. 김용식 장관의 장남이자 김용익 작가의 조카인 김수환 선생께서 한산신문(2005.11.19)에 쓴 글 일부다.

나의 삼촌은 항상 책만 읽고 문학을 꿈꾸는 사람으로 비현실적이고 비사교적인 사람이었다. 나의 조부님 곧 그의 아버지(김체호, 마지막 통영읍장)는 그의 장래를 걱정하여 삼촌이 나이가 차자 문학가는 밥을 굶기 쉬우니 부잣집 며느리를 얻어 밥이나 먹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 생각하시어 그때 중매로 거제도 옥포의 큰 어장 하는 집 딸에게 장가를 가게 하자 삼촌은 무조건 반대를 하였는데 이유는 단 한 가지, 부잣집이 싫었다는 것이었다. (중략) ​나의 삼촌은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확실히 좀 괴짜였다. 통역관 시절 미군 장교가 어디서 생긴 것인지 큰 장닭 한 마리를 주며 이것을 가지라고 하자 필요 없다고 하니 장교가 필요 없으면 다른 사람 주면 될 것 아니냐고 하자 할 수 없이 닭을 들고 길에 나가서 길가는 사람보고 이 장닭 가져가라고 하니 모두 미친 사람인 줄 알고 피하였는데 마침 지나가는 지게꾼을 만나 이것이 병든 닭이 아니니 가지고 가서 잡아 먹으라고 하자 받아 가더라고 하였다. (중략) 그의 일생은 별로 가진 것도 없었고 교수 월급에 얼마간 출판된 책에서 나온 인쇄비로 비교적 청빈하게 사신 편이었다.

그러곤 또 오래도록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불현듯 기억이 나서 대표작 <꽃신>을 검색해 보았다. 당시 돋을새김 출판사의 리뷰 일부다.

발표와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소설'로 선정되어 「뉴요커」 등 세계 주요 매체에 19회에 걸쳐 소개된 작품 <꽃신>. 김용익 작가는 한국인 특유의 감수성인, 수심 깊은 슬픔의 서정을 뿜어내는 작품을 써 '마술의 펜'이란 칭호를 얻기도 하였다. (중략) 장인의 손길로 조탁을 거듭한 그의 작품 세계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한국인의 깊고 절제된 서정이 녹아있으며···.

통영 김용식김용익기념관에서 만난 김용익 작가의 젊은 시절 초상 /박헌정
통영 김용식김용익기념관에서 만난 김용익 작가의 젊은 시절 초상 /박헌정

통영에는 ‘김용식김용익기념관’이 있다. 김수환 선생이 김용식, 김용익 형제가 유년 시절을 보낸 생가를 통영시에 기증해서 문 연 곳이다. 그곳에서 본 김용익 작가의 젊은 시절 모습은 너무나 가냘픈 미남이라 과연 저런 사람이 그렇게 기인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뒤늦게 읽은 <꽃신>에서 한국적인 서정과 슬픈 아름다움을 물씬 느껴볼 수 있었다. 백정의 아들은 어릴 적 동무인 뒷집 갖바치의 딸을 마음에 두었다. 사이 좋은 이웃이다. 마을에 혼인이 있으면 백정은 고기를 팔고 갖바치는 꽃신을 판다. 갖바치 집의 형편이 낫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고기 장수는 돈을 벌고 갖바치는 고무신에 점점 밀려 옹색해진다. 어느 날, 남자는 청혼했다가 뜻밖에도 백정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몇 년 후 피난지 부산에서 우연히 그 노인을 만나지만 떨리는 분노와 슬픔으로 꽃신만 바라보다가 돌아서고, 돌아서고···. 얼마 후 노인은 죽고 부인으로부터 딸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김용익 작가의 작품세계는 비교적 늦게 국내에 알려졌다. 그런데 이미 1983년 KBS TV문학관에서 방송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튜브 옛날티비=KBS Archive
김용익 작가의 작품세계는 비교적 늦게 국내에 알려졌다. 그런데 이미 1983년 KBS TV문학관에서 방송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튜브 옛날티비=KBS Archive

작품 속 몇몇 문장이 달빛처럼 처연하게 내 마음에 들어왔다.​

- 지금 저 판자 위에 꽃신 다섯 켤레만이 피난민으로 가득 찬 시장의 공허를 담고 있다. 그것이 다 팔려 가기 전, 한 켤레 신발을 위해 돈주머니를 다 털어버리고 싶지만 결혼 신발 아닌 슬픔을 사지나 않을까 두렵다.

​- 그녀와 그녀의 꽃신은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녀 뒤를 따랐으며 꽃신 뒤축과 그녀의 흰 버선 뒷모양만 바라보았다. 내 마음이 그 뒤를 따르면 그들은 마치 나로부터 멀리 도망칠 운명에 있는 것처럼 고개를 넘고 또 넘어 달아났다. 나의 행복을 담은 꽃신은 결코 똑바로 나를 보고 걸어오지 않았다.

​- 나는 꽃신이 다른 사람에게 다 팔려가기 전 한 켤레 가지고 싶었지만 꽃신 아닌 슬픔을 사지나 않을까 두렵다. 나는 먹구름 속에 자취를 감추기 직전 길을 더듬어보는 눈초리로, 꽃신을 바라보았다. 꽃신이 세 켤레 남았을 때 나는 그곳에 차마 가지 못했다. 예쁘게 꾸며진 꽃신의 코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훌쩍 뒤돌아설 것 같아 더 이상 찾아 못 갔다.

​- 부인은 내가 내놓은 지폐를 잠시 보고 신발을 싼 꾸러미를 내밀었다. "이 돈 가지면 이제 버젓이 장사도 치르겠다." 나는 그 꾸러미를 받지 못했다. 잠든 아이가 꼭 쥐고 자는 버들피리를 빼앗는 것 같이, 아직도 신집 사람이 꽃신을 꼭 쥐고 있는 느낌이었다.

​- "따님을 위해 이 꽃신을 가지세요." 그녀는 이 꽃신을 가지게 될까. 다만 그녀가 어느 곳에 있건 꽃신을 받아주었으면 싶었다. "그 애는 죽었다. 그 애는 지난 여름 폭격에 죽었다." 아아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래 전 내 예감은 그녀의 죽음을.

​영어로 쓴 작품을 번역해서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또 다른 결의 아름다움, 불편하고 불안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듯했다. 어째서 늘 아름다움과 슬픔은 같은 길 위에 서 있는 걸까. 그를 만난 을씨년스러운 3월을 잊지 못하는 것은 꽃신의 슬픈 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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