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전주 시민 자부심인 최강 프로축구팀
올해 왠지 심상찮다, 내 팀을 살리자!
어제, 전주 월드컵 구장에서 전북현대모터스 대 수원FC의 야간 경기를 관전하고 왔다. 이번 시즌 네 번째 ‘직관’이다. 그동안 ‘나의 팀’ 전북의 멋진 경기를 기대하며 갔다가 실망하곤 했는데, 오늘은 백승호, 송민규, 박진섭의 골이 터져 3:1로 이겼다. 신난 팬들은 마치 축제라도 즐기듯, 끝난 후에도 자리를 지키며 응원을 이어갔다.
전주로 이사 온 이후 열렬한 프로축구 팬이 되었다. K리그1은 물론이고, 2부인 K리그2 중계까지 열심히 챙겨 본다. 내가 일 없는 은퇴 세대가 되어 그렇기도 하지만, 최근 10~20년간 리그 수준이 높아지고 경기도 뜨거워졌다. 특히 월드컵 16강 이후 경기장마다 관중이 늘고, 선수들 플레이도 더 살아났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가족 또는 연인, 그리고 여성 관중의 증가다.
축구의 인기는 서울보다 지방 도시에서 더 높다. 여가를 즐길만한 문화적 인프라가 적기도 하고, 축구팀은 지역을 대표하는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 전북에서는 ‘항상 이기는’ 전북현대가 갖는 무게감과 그로 인한 도민의 자부심이 결합하여, 조용한 지역사회에 주기적으로 불꽃을 틔워주는 기폭제 역할을 해왔다. 경기가 있는 날에는 녹색 유니폼을 입은 시민들을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리그 우승을 9회나 했고, 백승호, 조규성, 김문환, 김진수, 송민규, 이동준, 문선민, 홍정호, 박진섭, 정태욱 등 선수 하나하나가 국가대표급인 명문구단이 우리 지역에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팬들은 늘 축구팀을 자랑스러워했고, 경기장의 무시무시한 응원 열기와 함성은 상대 팀을 주눅 들게 해서, ‘전주 원정에서는 이기기 힘들다’는 철옹성의 이미지를 굳혀왔다.

그런데 올해 봄, 위기가 찾아왔다. 이곳 전북 팬과 구단의 관계에 금이 가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의 기 싸움이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성적이었다. 명장 최강희 감독이 팀에 우승 유전자를 심어놓고 떠난 후, 외국인 감독이 두 번 더 우승을 지켜냈다. 그다음 지휘봉을 잡은 사람은 오랜 ‘전북맨’ 김상식 감독. 그는 첫해인 지난 2021년에, ‘타도 전북’을 외치고 나선 현대가(家) 라이벌 울산현대를 극적으로 제치고 어렵사리 우승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때부터 왠지 예전의 전북답지 않았다.
2022년에는 처음부터 답답한 경기를 하다가 막판에 힘을 내봤지만 결국 울산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고, 올해는 작년보다 더 답답한 경기력으로 한때 강등권인 10위까지 떨어졌다. 상대의 거친 견제에 선수들 발이 묶인 듯했고, 선수들의 부상도 이어졌다.
서포터스 팬들은 대표이사의 구단 운영과 감독의 전술을 비판하며 동시 퇴진을 요구했다. 승리를 기대하던 홈경기에서 졸전 끝에 역전패하던 날,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고 험한 분위기에서 감독을 질책했다. 떠들썩한 응원으로 상대의 기를 죽여야 할 홈경기에서 팬들은 응원을 거부하고 침묵으로 일관하여, 원정팀 응원 소리만 들리는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응원 대신 시종일관 대표이사와 감독 퇴진만 외쳐대니 선수들의 플레이 또한 위축되었다.

서포터스들은 팀의 경기력도 문제이지만 구단이 팬과 소통하려는 의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물론 팀과 팬, 팀과 지역사회 간 거리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나 같은 평범한 팬으로서는 소통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구단과 선수들이 팬과 가깝게 지내고 자주 만나는 것일까? 아니면 팬들에게 팀의 상황을 정확히 알리고 팀 운영방식을 공유하는 것일까? 너무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바람은 아닐까?
한편으로는, 구단으로서는 도대체 팬과 어디까지 소통해야 할지 참 갑갑할 수 있겠다 싶었다. 모기업 현대자동차가 구단 운영에 공들이며 선수 영입에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면 자금난에 시달리는 시민구단들과의 차이가 극명하다. 그렇게 투자하고도 열렬한 호응 대신 차가운 여론을 접한다면, 세계적인 기업이 뭐가 아쉬워서 인구 180만명도 안 되는 지역에서 프로팀을 운영할까 싶었다. 그래서 훌륭한 선수를 모아놓고 왜 저렇게 답답한 축구를 하나 싶어 그들의 격한 주장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한편으로는 ‘적당히 잘 끝나야 할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 입장도 비슷한 것 같다. 모기업의 투자를 충분히 인정하고, 경기에 지고 움츠러드는 선수들에게 짠한 마음도 있었다. 다만 현장의 운영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 것이고, 이대로 가다간 오래도록 쌓아온 명문구단이 한순간에 그렇고 그런 팀으로 떨어진다는 위기감이 생긴 것이다. 우리 팀이기에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 아니었을까.
갈등의 실마리는 마음고생하던 김상식 감독의 퇴진 이후 서서히 풀렸다. 팬들 요구 일부가 해결된 셈이었다. 김두현 감독대행 체제로 팀을 정비해서 그때부터 2승 2무로 반등의 발판을 마련하며 예전의 위용을 되찾을 기미를 보인다. 역시 프로는 성적으로 증명한다. 팬들의 감정은 한결 누그러졌고, 전보다 더 격정적으로 응원하며 팀에 대한 애정을 다시 끌어올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올 시즌 리그 우승은 물 건너간 것 같다. 그래도 최대한 상위권에 오르고, 아시아챔피언스리그나 FA컵에서의 성과를 기대한다.

우리는 유럽의 축구 열기를 잘 안다. 인구가 수만 명에 불과한 소도시에서도 2부, 3부 리그 경기가 펼쳐지면 관중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자기 팀을 열광적으로 응원한다. 물론 축구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주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이 순간 축구는 나의 소속감과 정체성이 투영된 우리 군대가 적과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던 천만 인구의 서울에서는 몰랐는데 이제야 축구 속에 들어있는 시민적 DNA를 느낀다.
인생 2막에 재미 붙일 일을 제대로 찾아냈다. 80년대 프로야구팀 MBC 청룡 이후 정말 오랜만에 응원하는 팀을 갖게 되었다. 누구는 반려동물에 흠뻑 빠져 살고, 누구는 임영웅과 함께하며 행복한 것처럼, 사랑하고 응원하는 ‘내 팀’을 갖는 것은 소중하고 즐거운 일이다. 지난봄에는 부진한 경기력과 경기 외적인 요인 때문에 지루하고 불편했지만 이제 좀 편한 마음으로 응원 구호 ‘오오렐레’를 함께 외치며 몰입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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