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코로나와 암 때문에 어긋난 계획
3년 만에 다시 시작했다
지금은 목요일 새벽, 급히 원고를 쓰고 있다. 마감이 코앞인데 너무 바빠 이번 주 원고를 준비하지 못했다. 백수가 왜 바빴냐고? 백수도 가끔 뭔가 몰릴 때가 있다. 자유와 불규칙성은 앞뒷면 관계니까. 지난주에는 필리핀에 다녀왔고, 그제는 강연, 어제는 대장 내시경 검사를 했다.
두 끼를 굶고 밤새 속을 비우느라 화장실에 들락거린 터라 아주 힘들었다. 수면 검사가 끝난 후 잘 먹고 푹 잤더니 이제 좀 살만하다. 그래, 이번 주 원고는 강연 이야기로 때우자. 오랜만의 이벤트였으니.
한동안 ‘해외 한 달 살기’를 주제로 강연했다. 긴 해외여행이 모두의 로망이 되던 때였고, 그걸 조금 먼저 시작한 내게 이야기 들려달라며 불러주는 곳이 꽤 있었다. 재미있고 돈도 생겼다. 얼떨결에 유명해지나 싶던 때,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그대로 물거품이 되었다.
‘이참에 공부나 하자.’ 여행지에서 까막눈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역사를 공부해서 다시 도전하자! 그런데 대학원 사학과는 여행을 업그레이드할 만한 지식을 배우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 건 이미 책에 다 있다. 교수님들과 서양사 원서를 놓고 영어 독해만 실컷 했는데 그래도 머릿속에 서양사의 윤곽이 정리되긴 했다.
‘그래, 이거야!’ 여행과 역사와 문학의 조합, 자아도취에 빠져 내 콘텐츠 계획이 알차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할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코로나가 서서히 걷히자 한 대학교에서 특강 형식으로 불러주었다. 깊고 복잡한 이야기보다 여행이라는 매력적인 주제에 인문적 콘텐츠를 덧씌워 쉽게 풀었더니 학생들 반응이 좋았다.
한참 고무되던 때, 이런, 혈액암이 찾아왔다. 다시 한번 휴업. 그리고 오늘 3년 만에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때 끝으로 강연했던 바로 그 학교에서다.

나의 여행 동기는 크게 둘이다. 중세부터 근현대까지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을 직접 보는 것, 그리고 열심히 놀고 싶은 욕구다. 전자는 주로 유럽 쪽을 향하게 만들고, 후자는 물가 싸고 기후 좋고 마음 편한 동남아나 중국 등이다.
특히 암 투병하며 죽음에 대해 깊게 느껴본 후, 좋은 죽음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는, 생이 길든 짧든 최대한 즐겁게 잘 사는 게 장수하는 거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주변 눈치 살피지 않고 열심히 돌아다닌다. 그런데 아무리 놀기 좋은 곳이라도 자주 가다 보면 그곳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 상황에 관심이 생긴다.
그래서 이번 특강에서는 지금껏 혼자 여행한 경험이 거의 없었을 학생들에게 내적 성장을 위해 해외여행에 도전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런 건 최대한 짧아야 한다. 길어져 아이들을 다독다독 잠재우면 그걸로 끝장이다)과 함께 동남아 나라들의 역사적 배경과 현재 직면한 정치, 사회, 경제 상황을 살짝 엮어 그 지역이 우리에게 어떤 중요성이 있고, 청년 세대에게 어떤 기회가 될지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PPT 자료를 만들려니 처음에는 더듬거렸지만, 영상자료도 많이 넣어가며 열심히 구성했다. 담당자는 의무 참석이지만 학점은 없는 특강이니 학생들 반응에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귀띔해 주었다.
과연 뒤쪽부터 채우기 시작한 200여명의 학생 가운데 깨어있는 건 시종 눈빛 초롱초롱한 일부 학생과 특강에 함께 참여한 교직원들, 그리고 붙어 앉아 꽁냥거리는 커플들뿐이다. 이런 상황이야 익숙하다.
아마도 스마트폰에 집중하는 학생들은 동남아 식민지 역사에 관해 추가 검색 중이고, 평화롭게 눈 감은 학생들은 지금 쿠알라룸푸르 빌딩 숲을 상상하는 거라고 스스로 위안해 본다. ‘나도 40년 전 채플 시간에 저랬지. 애나 어른이나, 특강은 자는 시간이지. 뭐 하러 안 자? 시간 아깝게, 왜 안 자?’
시간이 조금 빠듯해서 남은 건 2차 강연으로 넘기고 끝냈다. 3년 만의 강연 소감? 글쎄, 좀 허전하다. 아무 질문도 없을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비수 같은 질문을 상상하며 열심히 자료를 읽고, PPT 화면을 계속 매만지고, 눈이 뻐근하도록 자료 사진을 찾았다. 그래서인지 끝나고 나니 마치 중간고사 끝난 날의 기분과 비슷하다.
학생들은 내 이야기에 크게 집중하지 않았고, 강연료도 적다. 하지만 괜찮다. 내겐 특별하고 재미있고 보람된 일이었다. 여행경험과 책 속의 지식을 간략히 정리해서 전달하려니 짧은 시간에 집중적인 공부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릿속의 것을 콘텐츠로 만들어 남 앞에 선다는 것에서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뭐에 집중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아내는 스트레스받으면 안 된다며 걱정하고 잔소리한다. 그래서 뭘 할 때 아내 앞에서는 대충 하는 척한다. 하지만 현역 시절 회사 일보다 더 열심히 한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제 내 앞에 있는 노후의 삶 속에서 내가 붙잡을 건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은퇴 후에 눈높이를 낮춰 거칠고 힘든 일을 옹골지게 해나가는 사람도 있고, 끝없이 뭔가 호소하며 갈팡질팡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나도 ’책 보고 글 쓴다‘라는,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모호한 내 생활의 방향타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일은 꼭 붙잡아 열심히 한다.
많이 준비한 내용이라 마음 같아서는 다른 학생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수능 끝나고 아이들 들떠있을 때 이야기해 주면 잘 들을 텐데. 아니면 직원 교양 교육? 하지만 나 좀 불러달라며 여기저기 영업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역시 전성기의 에너지는 아닌가 보다.
여성경제신문 박헌정 작가 portugal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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