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중의 슬기로운 인간관계]
체면은 왜 그토록 중요한가?
행동 변화에 대한 비합리적 신념
체면을 세워주는 CEO 소통 전략
체면이 깎이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할 것이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감정적 충격과 마비 현상이다. 마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무대 위에서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과 굴욕감이 압도한다. 이러한 감정은 즉각적인 신체 반응을 동반하여 얼굴이 화끈거리거나 심장이 거세게 뛰고,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되는 듯한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짧은 충격이 지나가면, 뇌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해석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인지적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반문과 함께, "이것은 공정한 비판이 아니라 인신공격이다"와 같은 합리화가 시작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비극적인 인지적 전환이 일어난다. 당사자의 관심은 지적받은 내용(예: 업무상의 오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에게 굴욕감을 준 방식과 사람에게로 고정된다. 비판의 핵심적인 내용은 더 이상 수용되지 않고, 오직 상처받은 자아를 방어하려는 생각만이 남게 된다.
상황이 종료된 후에도 그 여파는 오래 지속된다. 수치심은 종종 분노와 원망으로 바뀌어 자신에게 모욕감을 준 상대를 향한 적개심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당사자는 그 순간을 반복적으로 곱씹으며 고통을 재생산한다.
결국 이러한 경험은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지만, 이는 리더가 기대했던 긍정적인 개선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는 이런 굴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된 방어적인 위축과 회피로 이어진다.
당사자는 향후 유사한 상황에서 의견 개진을 포기하거나, 솔직한 보고를 꺼리게 되며, 조직에 최소한의 방어적인 태도로만 임하게 될 수 있다. 이처럼 체면의 손상은 한 개인의 학습 의지를 꺾고 관계를 단절시키며, 조직의 잠재력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

체면은 왜 그토록 중요한가?
체면이 이토록 강렬한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것이 한 개인의 '사회적 자아 정체성' 그 자체이자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은 체면(Face)을 "개인이 특정한 사회적 만남에서 스스로 주장하는 긍정적인 사회적 가치"라고 정의했다.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연극무대와 같다. 우리는 모두 이 무대 위에서 유능한 전문가, 합리적인 동료, 믿을 만한 사람과 같은 특정한 역할 또는 얼굴을 연기한다. 이 얼굴이 바로 체면이다.
이 얼굴은 나 혼자 주장한다고 완성되지는 않으며, 상호작용하는 타인들(관객)이 "그래, 당신은 유능한 전문가가 맞아"라고 인정해 주고 그것에 맞게 대우해 줄 때 비로소 유지될 수 있다.
체면이 깎이는 순간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이유는 바로 이 '사회적 자아'가 무대 위에서 공개적으로 부정당하고 파괴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리더가 모두 앞에서 "당신은 무능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히 나의 행동에 대한 비판을 넘어, 내가 애써 주장하고 연기해 온 유능한 전문가라는 얼굴 자체를 찢어버리고 "당신의 역할은 가짜"라고 선포하는 것과 같다. 나의 사회적 정체성, 즉 '나의 존재 가치'가 공개적으로 짓밟히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더 깊은 사회적 생존 본능이 결합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며, 우리의 뇌는 수만 년에 걸쳐 '무리에 속하지 못하는 것 = 생존의 위협'이라는 공식을 새겨왔다. 고프먼이 말한 체면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이 집단에 속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사회적 면허증’과도 같다.
체면이 깎인다는 것은 "당신은 이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자격 미달이다"라는 공개적인 선고처럼 느껴진다. 그 순간 우리가 느끼는 수치심, 굴욕감, 그리고 분노는 '무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원초적인 생존의 위협 신호와 연결된 강력한 경보음인 것이다.
리더는 어떻게 '의도치 않게' 체면을 깎는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사회적 관계에서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려 노력한다. 웬만해서는 타인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행동은 피하려 주의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의도치 않게 상대의 체면을 깎는 실수를 한다.
이런 실수는 악의에서 비롯되기보다, 두 사람 간의 '힘의 위계(Power Hierarchy)'가 명확할 때 훨씬 더 자주 발생한다. 힘을 가진 쪽은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감정에 둔감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순간은 효율성과 속도를 감정보다 우선시할 때이다. 리더의 위치에서 업무 성과라는 목표에 과도하게 몰입하면, 감정이나 체면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마감을 앞두고 팀원이 보고할 때 "됐고, 본론만 말해. 결론이 뭐야?"라며 말을 자르는 식이다. 리더의 의도는 '신속한 시간 절약'이었겠지만, 듣는 사람은 '내 의견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모욕감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들도 배워야 한다’는 명목으로 한 사람의 실수를 공개적인 본보기로 삼을 때도 마찬가지다. 팀 회의에서 "여러분이 실수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이겁니다. 김 대리처럼 이렇게 하면 안 돼요"라고 한 사람의 오류를 지적하는 경우다. 리더의 의도는 전체의 학습일지 몰라도, 당사자에게는 공개적인 망신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발생하는 '감정의 유출'이 상대의 체면을 깎기도 한다. 다른 곳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사소한 오타를 빌미로 부하직원에게 폭발시키는 식이다. 혹은 농담이라는 포장지로 비판을 감싸는 경우도 있다. "박 과장은 회식 때만 제일 열심히 하는 것 같아" 같은 말은 웃음을 자아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듣는 이에게 깊은 모멸감을 준다.
이 모든 순간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힘을 가진 쪽이 풀어진 마음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결과(Impact)로 다가갈지 헤아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힘을 가질수록 남의 감정에 둔감해지기 쉽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다는 변명은, 이미 깎여버린 상대의 체면을 되돌려주지 못한다.
행동 변화에 대한 비합리적 신념
우리는 종종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을 인간관계에도 적용하려 한다. 특히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아야 할 때 그렇다. "상대방 체면을 고려하는 식으로 만만하게 대응하면 근본적인 변화는 생기지 않고 계속 반복될 뿐이다", "좋게 말하면 나를 약하거나 우습게 볼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강한 질책이나 공개적인 모욕은 즉각적인 효과를 보인다. 상대는 그 자리에서 행동을 멈추고 움츠러든다. 분명 '앞에서는 교정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리더나 개인이 이 즉각적인 복종을 진정한 변화라고 착각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관계와 성장을 좀먹는 치명적인 실수의 시작이다.
단언컨대, 고통과 모욕으로 얻어내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회피이거나 복종일 뿐이다. 당사자는 '왜 이 행동이 잘못되었는가'를 내면화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다음번에 들키지 않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이 모욕감을 되갚아줄까'를 고민하게 된다. 눈앞의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더 큰 문제들이 자라나고 있다.
진정한 변화는 두려움이 아니라 존중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의 체면을 고려하며 접근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대응이 아니다. 이는 "나는 당신을 인격체로 존중하며, 스스로 문제를 깨닫고 변화할 기회를 주겠다"는 가장 성숙하고 강력한 메시지다. 눈앞의 복종에 만족하며 장기적인 신뢰와 자발성을 잃는 것, 그것이야말로 리더가 피해야 할 가장 치명적인 실수가 아닐까.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는 리더의 소통 전략
바로 이 지점이 데일 카네기가 리더가 되는 방법의 5번째 원칙으로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어라(Let the other person save face)"를 제시한 이유다.
카네기는 리더의 궁극적인 목적이 상대를 굴복시키거나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내는 데 있음을 정확히 간파했다. 굴욕감은 원한을 낳지만, 존중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을 만든다.
그렇다면 이 강력하고도 중요한 원칙을 우리는 구체적인 업무 현장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구성원의 실수를 바로잡아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순간, 혹은 쓴소리해야 하는 민감한 상황에서 '체면을 세워주는' 리더의 실천적 지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조직을 이끌다 보면 누군가의 성과를 질책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불편한 순간과 마주할 수 있다. 많은 리더가 이러한 어려운 대화를 두려워한다. 소통 전략의 핵심은 '문제(행동)'와 '사람(존재 가치)'을 철저히 분리하는 데 있다. 최악의 방식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왜 이렇게 꼼꼼하지 못하냐"며 인격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교정이 아닌 모욕이며, 돌아오는 것은 반성이 아닌 원망뿐이다.
성숙한 리더는 반드시 1:1 비공개 공간을 택한다. 그리고 판단이 아닌 사실로 대화를 시작한다. "김 코치님은 무책임하다"가 아니라, "지난주 보고서의 A 항목 데이터가 누락되었다"고 말하는 식이다. 그다음, "이런 실수를 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캐묻는 대신, "이 업무를 진행하며 어려웠던 점이 있었나?"라며 상대방에게 해명하고 존중받을 기회(체면)를 준다. 마지막은 과거에 대한 비난이 아닌, "다음에는 이 실수를 막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먼저 점검하면 좋을까?"라는 미래지향적 해결책으로 마무리된다.
심리적 안전감의 핵심 열쇠
구성원의 체면을 존중하는 리더의 섬세한 소통 방식은, 기업들이 관심을 두는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에 기반한 조직문화를 만드는 핵심 열쇠와 같다. 심리적 안전감은 조직 안에서 내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고, 실수를 인정하고, 다른 생각을 이야기해도 불이익이나 망신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문화를 말한다.
리더가 질책이나 나쁜 소식을 전하는 그 가장 불편한 순간에도 구성원의 체면을 지켜주려고 애쓰는 모습은, 그 어떤 구호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준다. "이곳은 널 인격적으로 존중해", "실수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성장의 기회야", "솔직하게 문제를 꺼내놔도 괜찮아" 같은 굳건한 신뢰의 신호다.
이건 단순히 매너가 좋고 배려심이 깊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구성원들이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솔직하게 협력할 수 있는, 즉 심리적 안전감이 높은 조직 문화를 만드는 가장 현실적이고 근본적인 방법이다. 기업들이 그토록 바라는 진짜 성과와 혁신은, 바로 이렇게 단단한 신뢰의 땅 위에서만 꽃필 수 있는 것 아닐까.
여성경제신문 김승중 심리학 박사·마음의 레버리지 저자 spreadksj@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