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중의 슬기로운 인간관계]
말하게 하면 마음을 얻는다
갈등 해결을 위한 ‘말하게 하기' 워크시트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반대와 갈등에 직면한다. 야심 차게 준비한 기획안에 "이건 현실성이 없어요"라며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동료로 인해 마음 상할 수 있고, 계약서에 없던 기능을 추가해달라며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고객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돌리고 협력을 얻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음은 답답하고 초조해져서,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려다 보니 자꾸만 말이 많아진다. "그게 아니고요, 제 말은···", "이 부분을 다시 보시면···" 등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간절하게 설득해 보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의 표정은 더 굳어지고 반대의 벽은 더 견고해질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다. 반대라는 예상하지 못한 장벽을 만나면 당황한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을 경청하기보다 자기 입장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데 급급하다. 나의 논리와 합리성으로 상대를 이해시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자기 입장에서 하는 말일 뿐 상대의 귀에는 '소음'이나 '압박'으로 들리기 십상이다. 방어벽을 단단히 친 사람에게 아무리 매력적인 말을 쏟아부어도 그 말은 그저 벽에 부딪혀 떨어지는 돌멩이와 같다.

데일 카네기는 이런 교착 상태를 푸는 아주 간단하지만 강력한 원칙을 제시했다. 바로 "상대방이 말을 많이 하도록 만들어라(Let the other person do a great deal of the talking)"이다. 이는 단순히 상대의 불만을 들어주라는 소극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감정의 압력이 가득 찬 풍선에서 김을 빼주는 '안전밸브'를 열어주라는 실제적인 전략을 말한다. 상대가 자기 생각과 감정, 불만을 남김없이 쏟아내도록 판을 깔아주라는 것이다.
이러한 ‘먼저 상대방의 솔직한 속내를 끌어내는 접근’의 중요성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지혜를 넘어 가장 치열한 비즈니스 협상 테이블에서도 핵심 원칙으로 꼽힌다. 세계적인 협상 교육기관인 하버드 협상 프로젝트(Harvard Negotiation Project)는 갈등 해결의 첫 번째 단계를 바로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듣는 것’으로 정의한다.
프로젝트의 공동설립자이자 명저 <Getting to Yes>의 저자인 윌리엄 유리(William Ury)는 특히 ‘듣기의 힘(The power of listening)’을 강조하며 이것이 협상을 성공으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주장한다. 일방적인 설득보다 상대가 말하게끔 유도하고 귀 기울이는 자세가 협상력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듣는 것이 이기는 이유
언뜻 생각하기에 상대의 말을 더 많이 들어주는 것은 불리한 전략처럼 보인다. 상대의 요구를 모두 들어줘야 할 것 같고 내 주장은 펼칠 기회조차 잃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는 가장 효과적인 설득 전략이다.
첫째, '자기표현 욕구'를 충족시켜 방어벽을 허물기 때문이다. 갈등 상황에 있는 사람은 '내 입장을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이때 누군가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끝까지 들어주면 공격성과 방어 기제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은 그 자체로 강력한 보상이 되어 닫혔던 마음에 작은 틈을 만든다.
둘째, 스스로 문제점을 깨닫고 해결책을 찾게 한다.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계속 말하다 보면 그 논리의 허점이나 모순을 스스로 발견하기도 한다. 감정에 휩싸여 쏟아내던 말들이 정리되면서 "사실 제가 정말 화났던 건 그게 아니라···"라며 문제의 본질을 스스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는 내가 백 마디 말로 지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설득 효과를 가진다.
셋째, 문제의 핵심과 숨겨진 욕구를 파악할 수 있다. 상대가 쏟아내는 말 속에는 단순한 불평뿐 아니라,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비현실적인 기획안이라고 반대하는 동료는 어쩌면 과도한 업무량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고객은 사실 자신의 상사에게 보여줄 성과가 급한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의 숨겨진 진짜 욕구를 알아야만 진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경청은 무엇보다 강력한 자산인 ‘신뢰’를 쌓는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는 태도는 “나는 당신과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싶은 협력자”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모든 성공적인 협상의 기반이 되는 신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싹트기 시작한다.

어떻게 '말하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방이 마음 놓고 이야기하게 할 수 있을까? 다음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판단하지 않는 개방형 질문으로 시작하라.
"왜 반대하시죠?"와 같은 공격적인 질문 대신 "이 기획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떤 점이 가장 우려되시나요?"와 같이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묻는 말이 좋다. 내 생각과 논리를 확인하기 위한 닫힌 질문보다는 상대의 솔직한 의견을 듣기 위한 열린 질문은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시작하도록 돕는다.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듣고 있음을 보여줘라.
내가 듣고 있음을 상대가 알게 해야 한다. 고개를 돌려 보기보다는 몸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제스처를 취하면 좋다. "아, 그러셨군요", "그 부분은 미처 생각 못했네요"와 같은 짧은 추임새를 넣어서 상대가 더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반응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행동은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매우 중요하게 듣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다.
상대의 말을 요약하고 되물어 주어라.
"과장님 말씀을 정리해 보면, A안은 현실적으로 예산이 부족하고, B안은 일정이 너무 촉박하다는 말씀이군요. 맞나요?" 이렇게 상대의 말을 요약하고 확인하는 과정은 내가 그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음을 증명하고, 상대방은 자기 입장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침묵을 두려워하지 마라.
상대가 말하다가 잠시 멈췄을 때, 그 침묵을 서둘러 채우려 하지 마라. 그 시간은 상대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더 깊은 속마음을 꺼내기 위해 준비하는 중요한 순간일 수 있다. 조급함을 버리고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주도권은 당신에게 넘어온다.
갈등 해결을 위한 ‘말하게 하기' 워크시트
이 워크시트는 당신이 겪고 있는 갈등 상황을 분석하고, '말하게 하기' 원칙을 적용하여 해결 전략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준다. 반대를 타개하고 싶은 상황이 있다면, 제시된 질문에 답하면서 전략을 구상해 보자.
STEP 1: 상황 인식 (Situation Analysis)
갈등의 상대방은 누구인가? (예: 김 팀장, A 고객사 박 과장)
구체적인 갈등 상황이나 문제는 무엇인가? (예: 신규 프로젝트 업무 분담에 대한 이견, 납품 기한 조정 요청 거부)
상대방의 현재 입장이나 태도는 어떠한가? (비협조적, 불만 토로, 무리한 요구 등)
STEP 2: 원하는 결과 설정 (Define Your Desired Outcome)
이 대화를 통해 내가 얻고 싶은 이상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최소한 이것만은 해결되었으면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현실적인 목표)
이 문제가 해결된 후, 상대방과 어떤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가?
STEP 3: '말하게 하기' 전략 수립 (Develop Your 'Let Them Talk' Strategy)
상대방이 가지고 있을 만한 불만, 걱정, 숨은 욕구는 무엇일까? (최대한 상대의 입장에서 예측해 보기)
상대방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개방형 질문'을 던질 것인가? (최소 3개 이상 작성)
내가 대화 중에 빠지기 쉬운 함정(예: 반박하기, 변명하기, 말 끊기)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STEP 4: 대화 시뮬레이션 및 실행 (Simulate and Execute)
위 전략을 바탕으로 대화의 시작을 어떻게 열 것인지 머릿속으로 그려보자.
나의 목표는 '이기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임을 명심하자.
대화 후 기록:
내가 새롭게 알게 된 상대방의 진짜 속마음이나 입장은 무엇이었나?
대화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원하는 결과를 얻었는가?)
다음에는 무엇을 더 잘해볼 수 있을까?

결국 갈등 해결의 열쇠는 '무엇을 말할까'가 아닌 '어떻게 들을까'에 달려 있다. 우리는 흔히 더 논리적인 말로 상대를 제압해야 이긴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승리는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상대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는 용기 있는 선택은,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는 지름길이자 상대의 신뢰를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오늘부터 답답한 논쟁 대신 지혜로운 경청을 선택해 보자.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당신이 원하던 협력의 길이 눈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여성경제신문 김승중 심리학 박사·마음의 레버리지 저자 spreadksj@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