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
누구나 자신만의 소명이 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일
은퇴는 그런 일을 하는 시간
일전에 퇴직 예정 공무원을 상대로 은퇴 후에 할 일에 대해 강연한 적이 있다. 중간에 휴식 시간이 있었는데 한 사람이 자기는 그동안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한동안 쉬겠다고 한다. 나도 동감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일한 사람에겐 휴식도 필요하다. 다만 그 휴식 기간이 너무 길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너무 오래 쉬면 자칫 만사가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식도 막연히 쉬기보다는 3개월이나 6개월, 이렇게 기한을 정할 필요가 있다.
강연을 마치면 대개 몇 사람이 곁에 와서 질문과 못다 한 이야기를 주고받곤 한다. 그날도 그랬다. 50대 중반의 여성이 자신은 아직 정년이 몇 년 남았는데 해야 할 일을 찾았다며 근간에 퇴직할 예정이라고 한다.

얘기를 듣고 그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미국 유학 중에 도서관을 자주 찾았는데 그곳에 있는 우리나라 6·25전쟁 사료가 기대보다 부실한 걸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인생은 그걸 바로잡는 일을 하겠다고 그의 생각을 밝혔다.
신선한 쇼크였다. 남들은 정년 때까지 근무하기를 원하고 퇴직 후에는 해외여행을 떠난다든가, 평소 하고 싶었던 취미활동을 하겠다는 경우가 많은데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자신의 생을 바치겠다는 그의 얘기에 감동했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이 적지 않다.
누구나 선망하던 직장에 다니던 젊은이가 사표를 쓰고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에 나선 적도 있다. 그는 쿠바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한인 4세의 택시 운전사를 만나 그곳 한국인 교포의 역사를 듣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그냥 스쳐 지나갈 수가 없었다.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날은 가슴이 벅찰 정도로 뛰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제작해 쿠바 교포의 역사를 알려야 되겠다는 마음에서 모금을 시작했다. 그리고 제작에 전념하기 위해 직장에 사표를 냈다. 법복을 벗은 판사가 정치권을 저울질하고 있을 때, 공직에서 물러난 어른이 어디 괜찮은 자리 없을까 하며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30대의 젊은이는 잊혀가는 역사를 되살리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깨닫고 그길로 나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소명이 있다. 다만 한눈파느라 그저 잊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양말 하나조차 자신의 힘으로 신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신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신께서 “너는 내가 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고 물으면, 혹은 당신의 영혼이 똑같은 질문을 던지면 무어라고 답할 것인가? 인생 2막은 바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