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진료도 어려운 중증·희귀질환자들
약 없이 고통의 연속, 땜질식 응급 처치
"관심 절실", "환자 피해 면밀히 조사해야"

의정갈등이 이달로 1년이 된 지난 3일 서울 시내의 한 대학병원에서 한 의료진 뒤로 환자가 침상에 누워있다. /연합뉴스
의정갈등이 이달로 1년이 된 지난 3일 서울 시내의 한 대학병원에서 한 의료진 뒤로 환자가 침상에 누워있다. /연합뉴스

의정 갈등이 1년 넘게 지속되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의 고통이 깊어지고 있다. 이들이 직면한 피해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의료 공백이 장기화하면서 대학병원 진료가 필수적인 중증·희귀질환 환자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겪고 있다. 이들은 진료 예약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일이 반복되며 치료·수술 일정도 밀리는 상황이다. 응급상황에서도 의료진 부족으로 인해 적절한 처치를 받지 못하는 사례가 잇따른다.

의정 갈등 해결의 핵심인 의대 정원 확대 논의에 대해 정부와 의료계는 여전히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25일 제1법안소위를 열고 보건의료인력지원법, 보건의료기본법 개정안을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전날 취소되면서 27일 본회의 법안 통과도 어려워졌다. 정부가 의대 정원을 정할 때 핵심 역할을 할 전문가 기구인 의료인력수급추계위원회(추계위) 구성과 역할을 두고 의료계와 쟁점을 좁히지 못해서다.

의료 공백으로 특히 대학병원 진료가 필수적인 희귀질환 환자들의 치료 접근성이 낮아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희귀난치성 질환 중 하나인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은 외상이나 수술로 인해 손상을 입은 부위에 극심한 만성 통증을 느끼는 질환이다. 약물치료, 신경치료, 약물 펌프 수술법, 재활치료 등을 진행한다. 고통을 완화하는 척수 자극기 삽입 수술 등 CRPS 치료·수술에 대해 병의원, 종합병원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상급종합병원만이 유일한 선택지지만 진료와 수술은 밀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13년째 CRPS를 앓고 있는 강병진 씨(남·31)는 여성경제신문과 통화에서 "진료 예약이 자주 변경돼 약을 제때 처방받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며 "집에 남은 약이 있으면 버티지만 없으면 통증을 이 악물고 참는 수밖에 없다. 응급실을 가도 최소 3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토로했다.

그는 "매일 느끼는 불안감이 가장 큰 고통"이라며 "약을 제때 못 받을 거라는 불안이 크고 그게 누적되다 보니 우울증도 더 심해지고 있다. 하루빨리 의료 환경이 안정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희귀질환이 필수의료로 분류되지 않다 보니 환자들이 더욱 소외되고 있다고 했다. 강씨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고 의사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다른 병들보다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고 뒤처지는 느낌이 크다"라고 말했다.

지난 1월 서울 한 대형병원 응급실로 환자가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월 서울 한 대형병원 응급실로 환자가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부신백질이영양증(ALD) 환자들도 피해를 겪고 있다. ALD는 주로 10세 미만의 소아에게 발병하는 희귀 유전 질환으로 중추신경계와 부신피질에 영향을 미친다. 이 질환은 긴 사슬의 지방산이 체내에서 적절히 분해되지 않아 뇌와 신경계에 축적돼 신경 손상을 초래한다. 초기 증상으로는 시력 저하와 실명이 나타나며 이후 청력 손실, 언어 능력 상실, 운동 기능 저하 등이 진행된다. 증상 발현 후 평균 수명은 2~4년으로 알려져 있다.

김득한 ALD 모임 대표는 여성경제신문에 "ALD는 희귀질환이면서도 중증질환이다. 치료를 위해 상급종합병원 진료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이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지거나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하는 등 응급상황에 처했을 때 병원에 가도 담당 의료진이 없어 간호사가 임시 처치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대부분 링거나 수액 처치에 그치고 전문적인 치료는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병원 시스템의 오류도 의료 공백 속에서 두드러졌다. 김 대표는 "ALD는 뇌 신경계 질환으로 분류되지만 응급상황에서는 호흡기 문제가 먼저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의료진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환자가 신경과 진료 코드로만 분류돼 호흡기 질환으로 인한 응급상황에서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극심한 호흡곤란을 겪고 있음에도 마약성 진통제나 수면제를 처방하는 경우가 있다. 의사가 상시 대기 상태였다면 증상을 설명하고 의료진끼리 상의 후 적절한 조치가 이뤄졌을 것"이라며 "부모 입장에서는 우선 아이가 편안해 보이니 안심하지만 실상은 신경 손상이 더 심해지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환자 중에서도 수가 현저히 적은 희귀질환자들은 피해 조명에서도 소외돼 관심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소수의 사람이 가진 병이다 보니 국가는 관심이 없다. 소외되고 있다"고 했다.

한편 일부 환자단체들은 의료 공백으로 인한 환자들에 대한 피해 조사를 촉구했다. 지난 19일 한국중증질환연합회는 기자회견을 통해 환자 피해 조사 기구 발족과 실질적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연합회는 "정치권과 일부 시민단체가 의료 인력 수급 문제에 집중하는 사이 정작 수술과 항암 치료 지연으로 고통받는 중증 환자들의 피해 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의료 대란으로 인해 발생한 초과 사망 및 의료 공백 문제를 면밀히 조사할 기구가 필요하며 이를 기반으로 중증 및 응급환자들이 다시 의료 공백에 놓이지 않도록 법적 정비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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