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사장 직접 나서며 공들였으나
‘지재권 합의’ 여파로 급격히 유턴
對러 원전 수출 협력의 문 닫히나

한국수력원자력이 유럽의 슬로베니아 신규 원전 사업 수주 계획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최근 웨스팅하우스와 맺은 지식재산권 분쟁 합의에 따른 여파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더욱이 원자력 발전산업을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경쟁이 냉전 30년 만에 다시 달아오르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한수원의 행보로 한국이 친미(親美) 노선을 택했다는 시그널을 러시아를 비롯해 전 세계 각국에 줬다는 평가가 따른다.
10일 정부와 원전 업계 등에 따르면 최근 한수원은 슬로베니아 크르슈코 신규 원전 ‘JEK2 프로젝트’의 사업 타당성 조사에 불참하기로 결정하고 해당 프로젝트 발주사인 전력회사 젠에너지(GEN)에 이를 통보했다.
JEK2 프로젝트는 현재 가동 중인 크르슈코 원전 1호기 인근에 최대 2400메가와트(㎿) 규모 대형 원전 1~2기를 추가 건설하는 사업이다. 사업비는 최대 20조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젠에너지는 최종 입찰 후보로 프랑스 EDF와 미국 웨스팅하우스를 선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슬로베니아 원전은 그간 한수원이 수주에 공들인 곳이다. 지난해 6월 황주호 한수원 사장이 직접 현지를 찾아 GEN을 비롯해 현지 기업 13곳과 만나며 양국의 원전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원전 업계에서는 이 같은 한수원의 갑작스러운 궤도 변경은 지난달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맺은 ‘지재권 분쟁 합의’ 여파일 것으로 보고 있다. 양측은 타결된 지재권 협상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함구하지만 체코 원전 계약이 마무리되면 유럽 수주는 웨스팅하우스가 주도하고 한국은 중동·동남아 등 수주에 집중하는 식으로 합의했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한 원자력 업계 종사자는 “한수원의 슬로베니아 원전 수주 중단은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간 지재권 분쟁 합의 효력이 나타난 단적인 사례일 것”이라며 “유럽은 한국이 노릴 수 있는 최대 원전 수출 시장인데 세계 핵전략에 대한 통제권을 더욱 공고하게 하려는 미국과 손을 잡으면서 이를 포기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세계원자력협회(WNA)에 따르면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하고 지난해 말 기준 전 세계에서 추진되고 있는 원전 프로젝트는 총 186개인데, 이 중 약 38%인 70기가 폴란드·우크라이나·루마니아 등 유럽 국가들이다. 한수원은 지난해 말 스웨덴 전력회사 바텐폴이 발주한 원전 건설 수주전에서도 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원자력발전 산업을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경쟁이 냉전 이후 30년 만에 다시 달아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산업부에 따르면 인공지능(AI) 열풍과 이상기후가 이어지며 전력 수요가 급증하자 미국은 원전 지원 법률을 제정하고 차세대 원전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러시아는 국제사회 제재에도 해외 원전 사업에 잇따라 뛰어들어 외화벌이뿐만 아니라 글로벌 영향력 확대의 기회로 삼고 있다.
한국이 러시아와 중국 대신 미국의 손을 잡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글로벌 원전 수출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졌다는 관측도 나온다.
원자력계 한 고위관계자는 “한국은 러시아와 세계 원전 분야 공급망(Global Value Chain) 협력에 나서기도 했고 심지어 러시아로 원전 수출 무역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하는 등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며 “최근 러시아가 인도에 원전을 신규 건설하기로 하는 등 신흥국 시장 지배력을 높이고 있는 가운데 한국이 미국의 손을 잡는 시그널을 줌으로써 더 이상 이러한 기회는 열리지 않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