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주의 Good Buy]
평양냉면의 매력
'멋짐'을 간직한 음식
'사고'할수록 맛있는 음식
계산서가 많이 나올지언정, 마음이 가는 특별한 음식이 있다. 평양냉면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따져보면 평양냉면 한 그릇에 1만5000원 정도 하는 데다, 보통은 가서 냉면만 먹지 않는다. 제육이든 수육이든 만두든, 곁들임 음식까지 시키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평양냉면집 가서 1인 기준 3만원 넘게 쓰고 오는 건 다반사다. 게다가 웨이팅은 좀 심한가. 효율로 보면 도무지 답 안 나오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평양냉면을 찾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평양냉면이 가진 특유의 '멋짐' 때문이 아닐까. Good Buy 두 번째 이야기. 멋진 음식, 평양냉면이다.
멋짐이란 '500년 조선왕조 은행나무' 같은 것이다. 뿌리가 깊고, 그만의 이야기가 있고, 존재만으로 고유한 것. 평양냉면도 그런 음식이다. 역사와 내력이 있고, 서사와 사연이 있으며, 본점 위주다. 평양냉면의 격전지라 불리는 서울의 이름난 집들을 떠올려보면 우래옥, 을밀대, 을지면옥, 필동면옥, 평양면옥, 남포면옥, 부원면옥 등 하나같이 전통과 개성을 갖춘 곳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평양냉면이라는 장르에 존경을 갖고 있다. 멋진 음식이다.
시작은 어땠을까? 시간을 거슬러 가다 보니 '멋져 보이고 싶었던' 2018년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2018년은 평양냉면에 처음 입문한 해였다. 그 당시 평양냉면은 ‘걸레 빤 물’과 '미식가의 허세'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도대체 이 음식은 뭘까?' 호기심에 집 가까운 곳에 있던 분당 운중동의 능라도를 찾았다. 그렇게 마주한 나의 첫 평양냉면은 놋그릇에 담긴 연갈색의 냉면이었다.

6년 전 기억을 더듬어 그때의 첫맛을 떠올려본다. '맛있다'가 아니었던 것 같다. 맛있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이게 무슨 맛이지? 미식가들의 음식이라는데, 나는 미식가가 아닌가? 나도 평양냉면 먹을 줄 아는 사람이고 싶은데, 나도 있어 보이고 싶은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나를 아는데, 아마 그때 나는 (솔직히) 평양냉면을 맛없다고 느꼈는데, 맛을 느끼는 척을 했을 것이다.
"음~ 괜찮은데?"
멋은 원래 부리는 데서 시작한다고 했다. 평양냉면으로 멋 좀 부리고 싶었던 나는 능라도를 첫 시작으로 강남면옥, 서관면옥, 봉피양을 경험했다. 그러고는 누군가에게
"너 평양냉면 먹을 줄 알아?"
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도대체 평양냉면이 뭐라고 그런 심보를 부렸을까. 그러다 2020년 어느 여름. 충격의 평양냉면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을지면옥이다.
일단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모든 요소를 종합했을 때 나의 최애 평양냉면은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이다. 그러니 나에게 2020년은 코로나의 창궐을 겪었던 시기이면서, 평양냉면의 신세계를 경험한 시기이기도 했다.
평양냉면을 잘 아는 친구를 따라 을지면옥을 갔다. 가는 길이 미노타우로스의 미궁 같았다. 을지로의 후미진 골목과 좁디좁은 통로를 지나 간신히 을지면옥에 들어섰다. 노포 특유의 투박한 실내가 나를 맞이했다. 그동안 겪었던 고급 한정식 느낌의 평양냉면집과는 180도 다른 모양새에 당황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을지면옥의 냉면. 충격의 비주얼이었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긴 맹물 같은 투명한 육수··· 성의 없이 담긴 면 뭉치··· 실수로 뿌려놓은 것 같은 고춧가루···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 냉면이 1만5000원이나 하다니.

'그래도 유명한 집이라니까 일단 먹어나 보자. 입맛은 내가 맞출 수 있으니까.' 국물부터 한 사발 마셨다.
"와, 이게 뭐야?"
맛을 찾지 못해 말이 먼저 터져 나왔다. 이윽고 면을 풀어 먹었는데도 삶은 면을 물에 적셔 먹는 느낌이었다. 겨울에 멋 부리다 얼어 죽는 게 이런 거겠구나 싶었다. 멋 좀 내보려고 평양냉면을 기웃거렸는데 을지면옥의 높은 벽 앞에서 좌절을 맛보았다. 그럼에도 1만5000원이 아까워서 한 그릇 다 먹긴 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국물의 짭조름한 맛과 고기 맛 향수를 뿌린 것처럼 간신히 느껴지는 육향을 머리로 상상하며 말이다. 다 먹고 나니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돈이면 고기 주는 냉면을 먹고 커피까지 사 먹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후회했다.
문제는 그 후였다. 그 처참했던 을지면옥이 계속 생각나는 것이었다. 모기가 문 자리에 십자 모양으로 손톱자국을 내는 것처럼 을지면옥의 후기를 찾아보며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포털의 기사들과 유튜브의 영상에까지 흘러들어 의정부니 장충동이니 평양냉면의 계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찾으면 찾을수록 놀라웠다. 음식 하나에 이런 다양한 내력과 스토리가 있을 줄이야. 내가 아는 음식 스토리는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전쟁 중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두를 개발했다' 정도였는데, 평양냉면에 담긴 내력과 스토리가 탄탄하여 마치 삼국지를 보는 것 같았다.
아마 그때였던 것 같다. 평양냉면을 먹는 내가 멋있는 게 아니라, 평양냉면이 멋진 음식이구나를 느꼈던 때가. 집집마다 냉면의 철학과 감도가 다르고, 그 고집을 뚝심으로 지켜왔다는 사실이 흡사 '현대판 장인'처럼 느껴졌다. 을지면옥 사태(?) 이후 평양냉면과 연을 끊을 줄 알았던 나는 되려 평양냉면과 더 친해졌다. 이유는 명료했다. 1만5000원 짜리 냉면이 아니라 1만5000원 어치의 낭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평양냉면을 떠올리면 추억할 거리가 많다. 을지로에서 종로구 낙원동으로 재개점한 을지면옥을 다시 갔던 기억, 장충동에서 대학교에 다녔는데 한 번도 못 가봤던 필동면옥을 대학 졸업 후 10년 만에 처음 갔던 기억, 유튜브에서 배우 김대명 맛집으로 알게 된 남대문시장의 부원면옥을 갔다가 닭 육수 냉면은 내 취향이 아님을 깨닫고 반이나 남기고 온 기억, 최근 남대문에 새로 생긴 서령을 갔는데 냉면보다 국밥과 항정제육과 짜배기(글라스 소주)를 더 맛있게 먹었던 기억 등.
평양냉면은 알면 알수록 재밌는 음식이다. 음식에도 MBTI가 있다면 평양냉면은 T일 것이다. 사고할수록 더 맛있어지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