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심의 일본 열도 발도장 찍기] (26)
나가사키현의 테마파크, 하우스텐보스
네덜란드풍 별장지가 있는 테마파크
4월 튤립, 5월 장미, 6월에는 수국 축제

안개가 내려앉듯 소리도 없이 가랑비가 내리는 날이면 떠오르는 아스라한 풍경이 있다. 푹신푹신한 검은 흙을 뚫고 곱게 열을 지어 얼굴을 내밀고 늘어서 있는 쪽파 텃밭이다. 한 장의 사진 같은 기억이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고 하얗게 내리는 가랑비와 생생한 쪽파, 그리고 물기를 머금은 검은 흙. 실제로 흙이 검었는지는 자신이 없다.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요즘은 마당과 텃밭이 있는 주거 환경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농가에 마당이나 텃밭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텃밭은 주로 외할머니가 관리하셨는데, 외할머니는 마치 마법사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먹거리를 만들어 내셨으니 말이다. 철마다 여러 가지 채소가 자라고 소비되었을 터인데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쪽파뿐이니 희한한 일이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또 하나는 나가사키현(長崎県)에 있는 테마파크 ‘하우스텐보스’다. 시설 안에 호텔이 있는가 하면 계절마다 다양한 꽃으로 정원을 가꾸고, 놀이공원이 있으며 미술관까지 갖추고 있어서 리조트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곳의 장미 정원은 장미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2022년 장미의 계절 5월에 2박3일 동안의 나 홀로 여행을 떠났다. 장미 축제가 열리는 시기에 오로지 나 혼자 떠나는 여행, 이때만 해도 나는 장미를 열렬히 사랑했었다.

나가사키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전이었다. 호텔 체크인까지 시간이 있어서 가볍게 ‘데지마(出島)’ 관광을 했다. 하우스텐보스로 가기 위해 나가사키역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다 되어 있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서둘러 ‘나가사키 짬뽕’으로 배를 채우고 ‘JR나가사키 본선 시사이드 라인’에 올라탔다. 1시간 15분 정도 걸린다. 거의 전국에서 쓸 수 있는 교통카드는 이용할 수 없어서 매표 대에서 승차권을 샀다.
‘시사이드’인 만큼 바닷가를 볼 수 있을 터인데 비가 흩뿌리고 구름이 잔뜩 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언젠가 날씨가 좋을 때 다시 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전철은 하우스텐보스 역에 도착했다.
고풍스러운 개찰구를 통과하여 긴 다리를 건너 하우스텐보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묵을 ‘워터마크 하우스텐보스 호텔’은 시설 안을 도는 연결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호텔 프런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온천 이용권을 받았지만, 피곤하기도 하고 어둡기도 해서(나는 엄청 겁쟁이다) 그냥 뜨거운 욕탕에 입욕제를 풀어 몸을 담근 후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가뿐하게 일어났다. 나의 특기인 일찍 일어나기는 여행지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특기인지 나이 탓인지 점점 모호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작은 아이가 고3 때에 든 버릇이니 특기라 해도 거짓말은 아니지 싶다.
과일과 샐러드 중심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프런트에서 우산을 빌려 들고 바닷가 산책에 나섰다. 전날부터 내리던 비는 아침까지 흩뿌리고 있었다. 하우스텐보스가 개장하는 9시에는 부디 비가 개길 빌며 바다 냄새를 몸 속으로 끌어들였다.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나가사키. 공항에서 데지마로 향할 때도 산들이 낮다는 느낌이었는데 아침 산책에서 본 바다 건너의 산들도 역시 낮았다. 나가노(長野)의 산과 산맥이 웅장하다면 나가사키의 산은 포근하고 정겹다.

개장 시간에 맞춰 하우스텐보스에 들어갔다. 먼저 장미 정원 ‘그랜드 로즈 가든’을 한차례 둘러본 후 풍차가 인상적이라는 ‘플라워 로드’로 향했다. 네덜란드의 별장지를 모델로 만든 곳으로 1년 내내 다양한 꽃들이 꽃밭을 장식하는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벌써 외국에 온 기분이었다. 별장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고 맨션형 별장도 있다고 한다. 테마파크 안에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운하에는 개인 소유의 보트들이 정박해 있었다.


4월에 튤립이 만발했을 꽃밭에는 마리골드와 베고니아가 심겨 있었다. 아직 크게 자라지는 않아서 한 달쯤 지나면 더 보기 좋을 것 같았다. 2022년은 코로나가 한창일 때라 그다지 붐비지도 않고 즐기기 딱 좋았다.
저녁 7시부터 ‘물 매직 쇼’를 한다는 안내판을 확인하고 배를 타러 이동했다. 네덜란드풍 별장지를 거쳐 ‘장미의 운하’로 향하는 코스다. 별장지도 딴 세상처럼 아름다웠지만 강가의 벽을 장식하는 덩굴장미는 장관이었다. 덩굴장미는 벽을 타고 올라가게 유인할 수도 있지만 흘러내리게 할 수도 있었다. 발상의 전환이랄까 이런 발견이 재미있다.


배에서 내려 다시 한번 ‘그랜드 로즈 가든’으로 향했다. 구석구석 천천히 둘러봤다. 혼자이기에 오롯이 집중할 수가 있었다. 나 홀로 여행을 선호하는 이유다. 공기 풍선 안에서 고요히 지내는 듯한 기분, 혼자인데도 혼자라는 두려움이 없는 순간, 이런 시간이 참 좋다.
2년 전 나는 장미에 푹 빠졌었다. 꽃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장미를 발견하면 정신을 못 차렸다. 그것도 ‘덕질’이라면 덕질이지 싶다. 요즘은 장미에 대한 사랑은 식어가고 열매 맺는 나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후 가을에는 단풍으로 눈 호강시켜 주는 나무가 좋다.
저녁 시간대의 장미정원은 낮과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에서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는 장미들. 빛으로 장식한 강가와 건물들. 마치 마법의 세상에 빨려 들어온 듯했다. 혼자였지만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이곳은 장미의 정원이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기분 좋게 비가 쏟아진다. 장마철은 아니라는데 마치 장마철 빗소리 같다. 바람이 없어서 차분하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친정 텃밭의 쪽파가 눈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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