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심의 일본 열도 발도장 찍기] (25)
지바현(千葉県)에 있는 작은 에도(江戸), 사하라(佐原)
조선에는 김정호, 에도에는 이노 타다다카(伊能忠敬)
큰아들과 함께하는 미니 여행
몇 년 전부터 은근히 신경 쓰이는 곳이 있었다. 도쿄에서 가까운 곳이라 나 홀로 훌쩍 당일치기로 갔다 올 수 있는 곳. 고에도(小江戸)라 불리는 지바현(千葉県) 카토리시(香取市) 사하라(佐原)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옛 모습이 남아있는 관광지를 설명할 때 ‘고교토(小京都, 작은 교토)’ 혹은 ‘고에도(小江戸, 작은 에도)’라는 표현을 쓰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교토 주변은 ‘고교토’, 도쿄 주변은 ‘고에도’라 불린다.
‘고교토’는 지방의 다이묘(성주)가 살던 성 주변 마을의 모습이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교토가 정치의 중심이었던 시대, 지방으로 내몰린 무사 중에는 교토를 그리워하며 교토를 닮은 마을을 만들어 외로움을 달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으론 교토를 동경하는 지방 유지가 교토의 모습을 본떠 동네를 만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단다. 그중에 경제 개발 붐을 타지 못하고 뒷전에 밀렸던 곳들이 지금은 관광지로 주목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에도’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96년 경이었단다. 한 이벤트에서 쓰이기 시작했다는데, 관동 지방에서 에도시대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번 연휴 때 기회가 왔다. 단, 나 혼자가 아닌 큰아들과 함께. 엄밀히 말하면 아들의 여행에 내가 동행했다고 하는 게 맞지 싶다. 그 아들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학을 6년씩이나 다니고, 졸업 후에는 취준생 생활을 1년 이상 한 후, 드디어 작년 11월, 의욕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청년을 거두어 주는 곳이 있어서 힘겹게 사회인으로 데뷔한 아들이다.
큰아들과는 예전에도 같이 여행한 적이 있었다. 대학 입시를 마치고 내가 부산에 데리고 갔었다. 티격태격하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다행히 2박3일 동안의 여행은 편안했다. 오히려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보거나 전철 노선을 확인하는 등 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 경험이 있기도 해서 이번 여행도 안심하고 떠났다.
미리 계획된 여행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갑자기 가게 된 당일치기 여행. 5월 초, 큰아들이 긴 연휴 동안 당일치기로라도 어딘가 다녀오고 싶단다. 회사에서 잡담하던 중, 자기도 모르게 어딘가 다녀올 생각이라고 말을 해버렸단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낸 이상 지켜야 한다고. 여행 갔다 온 증거로 선물을 사와야 하는데 어디가 좋을지 모르겠다고. 도쿄 외의 지역이었으면 좋겠다고.
일본 사회에서 소소한 여행 선물은 필수다. 고민하는 아이에게 “나 가보고 싶은 곳 몇 군데 있는데”라고 말했다. 아들은 흔쾌히 좋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나에게 가고 싶은 곳을 정하란다. 나는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사하라’라는 곳을 택했다.

에도시대의 마을 모습이 남아있는 사하라는 마을 사이를 흐르는 좁은 강 양쪽으로 옛 가옥들이 늘어서 있다. 마을 안을 흐르는 좁다란 강에서는 30분 동안의 뱃놀이를 즐길 수 있다. 1인당 1300엔.
도착하고 보니 에도시대에 일본의 지도를 완성한 이노 타다다카(伊能忠敬, 1745~1818)가 살았던 곳이란다. 그는 상인이며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 측량사이기도 했다. 조선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김정호(金正浩, 1804~1866 추정)가 있었다면 에도에는 이노 타다다카가 있었다.

그가 살았던 집은 '이노 타다다카 고택'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에도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 지역을 이끌었던 집안인 듯했다.
마당을 통과하는 용수로는 집 앞을 흐르는 강에 놓인 용수용 다리를 건너 논으로 이어졌었다고 한다. 논에 물이 부족할 때는 용수를 흘려보내고, 물이 필요 없는 시기에는 마을 안을 흐르는 강으로 물을 떨어뜨린다. 그 용수로는 지금도 보존되고 있고 그 위에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아 관광 자원으로도 한몫하고 있다.

30분에 한 번씩 다리 중간에서 폭포처럼 물이 쏟아진다.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조용한 마을이다. 그 마을에 폭포를 연상케 하는 짧은 다리의 존재감이라니. 그야말로 고에도의 랜드마크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 쏠쏠한 재미다. 그게 뭐라고 오며 가며 물이 떨어지는지 자꾸 쳐다보게 된다.

5월 초임에도 불구하고 뙤약볕이 살을 지진다. 아들이 줄을 서서 예약권을 샀다. 30분 코스여서 30분 간격으로 사람을 태우고 내린다. 배도 대여섯 척은 있는 듯했다. 예약권을 사면 탈 시간을 알려준다. 기다리는 동안 동네를 산책해도 좋고 ‘이노 타다다카 고택’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우리가 기다린 시간은 20분 정도였다. 우선 배를 타기로 하고 일찌감치 줄을 섰다.
맨 앞에서 기다렸는데 타자마자 안쪽으로 들어가라는 바람에 맨 뒷자리에 앉게 되어 버렸다. 앞쪽에서 가이드가 뭔가 설명을 하는 듯했지만 모터 소리가 어찌나 큰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안 되는 건 깨끗이 포기. 그 대신에 같이 탄 사람들을 등지고 앉아 멀어져 가는 풍경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었다. 나쁘지 않았다. 나 홀로 배를 타고 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종종 강가에 서서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으면 나 또한 손을 흔들어 답하기도 하며 경치를 구경했다.

강가에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더 아름드리 풍성했으면 좋았겠고 강물은 조금 더 깨끗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데도 사하라의 하루는 잊지 못할 여행지가 되었다. 큰아들이 사회인이 된 후 처음으로 엄마인 나를 에스코트 해 준 여행이어서다.
“엄마 이 여행은 내가 쏠게.” 나는 구경만 하면 되었다. 소박한 당일치기 여행이었지만 내 마음은 풍요롭기만 했다.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고 길을 잘못 들었다고 초조해할 이유도 없는 낯선 곳에서의 산책. 둘이어서 의지가 되었고 둘이어서 웃을 수 있었다.
사하라 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여름의 풍물, 마쓰리(일본 축제) 행렬까지 보게 되었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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