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해미백일장 김경은 님 입상작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제 나이 20대였던 어느 날 서울에서 갑자기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큰언니랑 작은언니 형부들이랑 시골에 갔었던 그날 엄마는 아버지 경운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다쳐서 급하게 전남대 병원으로 이동하였으나 돌아가셨다고 하시면서 가망 없다고 해 외삼촌이 우리누나 죽어도 좋으니 수술받게 해달라고 해서 거기 병원에서는 할 수 없고 다른 병원을 소개해 줘서 엄마는 무의식 상태에서 옮겨 머리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 이후 7일 만에 엄마는 무의식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깨어나셨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머리가 하얀 백지장이 되어서 눈을 뜨신 그날부터 작은언니가 갓 태어난 딸을 업고 시골병원에서 엄마를 간병하면서 아버지랑 엄마의 기억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면서 엄마는 날로 좋아지셔서 퇴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아버지의 간병을 받고 시골에서 생활하시면서 아버지 속을 많이도 썩이셨어요. 밥을 하신다고 하면서 가스레인지 불을 안 꺼서 온통 집이 연기가 다 차 있어도 모르고 아버지가 농사일하고 와서 기겁하기를 몇 번 반복하시면서 시골집이 불날 뻔도 여러 번 있었죠. 아버지가 엄마의 간병을 힘들어하셨어요. 그래서 큰언니가 모셔 와서 인천서구에 있는 주간보호센터를 몇 년간 보내드리면서 엄마가 한 차례씩 허리도 다치시고 머리 수술 후유증으로 간질도 하셔서 그때마다 병원 신세를 많이 지기도 하셨죠.
그러던 중 엄마가 급격하게 열이 나서 병원에 입원하고 돌아가실 거 같다고 하셔서 온 가족이 모여서 엄마를 면회하고 고비를 넘긴 적도 많았어요. 엄마는 큰딸 작은딸 결혼시키고 사고가 나서 저의 결혼식 때는 서울 영락교회 본당에서 했는데 그때 엄마는 환자여서 어릴 때 엄마가 살던 집에 친구들이 왔다고 좋아하셨어요. 그로부터 큰언니 작은언니의 보살핌과 아버지의 물질적인 지원으로 엄마는 병원 생활이 차츰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하였죠. 긴 간병에 힘들어 보이는 언니를 위해서 거동이 아주 불편하신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드렸어요.
저는 그때 요양보호사를 하는 상태여서 언니에게 고생 그만하고 언니들이나 엄마를 위해서 요양원에 보내드려서 편안하게 해드리자고 했는데 언니는 요양원 보내고 그날 한숨도 못 자고 그다음 날 엄마를 다시 집으로 모셨어요. 언니가 엄마한테 너무 미안해서 못 보내겠다고 해서 다시 집으로 왔는데, 그날 저녁 엄마는 주무시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거동을 아예 못 하게 되었습니다.
계양구에 있는 요양원으로 모셔서 작은언니가 오가며 엄마 주 보호자가 되어 보살펴 드렸죠. 요양원에서 엄마가 파킨슨으로 인해 삼킴이 힘들므로 콧줄을 끼워야 한다고 해서 엄마는 그때부터 콧줄을 낀 채 요양원 생활을 하셨습니다. 당시 간질도 오고 갑자기 급성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적도 있었습니다.
온 가족이 중환자실에 모여 엄마를 면회하고 의사 선생님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해서 가족이 엄마의 장례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심정지가 왔으니 전기 심폐소생술을 한다고 하더니 조금 지나서 간호사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해서 또다시 위급한 상황을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요양원 생활을 하시던 중 아버지가 2018년도에 갑자기 몹시 아프시고 감기에 잘 걸리시고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셔서 종합검진을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 폐에 혹이 있어서 수술해야 할 거 같다고 했어요.
2018년 5월에 폐 혹 제거 수술을 하였는데 아버지는 그때 폐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엄마의 요양원 생활에 아버지는 방사선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부평성모병원에 다녀야 해서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더불어 투병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엄마 걱정을 많이 하셨고 점점 미약해진 아버지 모습에 마음이 아팠어요. 아버지는 끝까지 엄마 요양원에 면회를 자주 하셨는데 끝내 암을 이기지 못하시고 2022년 9월에 소천하셨어요.
제가 요양 보호사로 일하면서 힘들어도 부모님 간병 도와드리던 게 너무 좋았는데 그날 밤 근무였어요.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어 일이 손에 안 잡혔지만 끝까지 어르신들을 돌봐 드리고 장례식장에 갔어요.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는데 갑자기 작은 언니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작은언니의 아픔으로 가족들이 엄마를 제가 다니는 요양원에 모셔주길 바랐는데 엄마가 갑자기 열이 나서 병원에 입원하고 한 달 가까이 병원에 왔다 갔다 하면서 코로나도 걸리고 하여 늦게나마 23년 5월에 제가 다니는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제가 근무하는 층에 계셨죠. 저는 엄마를 날마다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드렸습니다. 엄마가 사고 난 지 30년이 되었는데 그때 엄마가 깨어나셔서 나중에 저희 식구들에게 해준 얘기가 지금 많이 생각나네요. 엄마가 꽃길을 걷고 있는데 외할아버지가 지금 뭐하냐고 소리치면서 가라고 해서 눈을 떴다고 했어요. 엄마는 지금 말도 못 하고 계시지만 제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사랑스럽고 이쁘고 엄마의 딸인 것이 되게 자랑스럽습니다.
엄마는 치매 증상이 있을 때마다 큰언니 집에서 자다가 집을 나가기를 수도 없이 해서 그때마다 파출소에 신고해서 찾았습니다. 큰언니네는 자다가도 엄마가 일어나서 밖에 나갈까 봐 수없이 확인했습니다. 엄마가 시골집에 계실 때 아버지를 너무 많이 힘들게 해서 치매는 어느 가족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 요양원에 계시지만 항상 엄마가 곁에 있어 든든하고 감사합니다. 엄마의 모든 병이 완쾌되진 않겠지만 고통 없이 제가 있는 곳에서 엄마와 딸로 늘 같이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