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익종의 삶이 취미, 취미가 삶]
취미는 단맛일까, 쓴맛일까?
삶도 그럴 것이다, 오묘한 맛

취미를 맛으로 따진다면 어떤 맛일까? 
취미를 냄새로 따진다면 어떤 냄새일까?

다양한 취미생활을 겪어(이 단어를 쓰는 건 아마도 쓰디쓴 경험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온 결과 가지는 의문이다. '싱겁기는--- 그런 생각 하는 사람은 당신뿐이야'라고 질책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제대로 된 취미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한 번쯤은 가져야 할 의문이다. 특히 `삶이 취미, 취미가 삶’이라는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삶을 규명하기 위해서라도 밝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취미는 즐거움과 행복함을 전제로 한다. 쓴맛을 보기 위해 취미를 갖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취미는 맛으로 따진다면 달콤함이요, 냄새로 따진다면 향긋함이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취미 생활을 즐기면서 항상 달콤함과 향기로움만 느꼈겠는가. 

때로는 화가 치밀 정도로 마음대로 안 될 때가 있었고, 어떤 때는 다 때려치고 싶을 정도로 낙담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쓰리고 신맛을 참지 못한 독자는 취미생활을 다른 것으로 바꿨을 것이고 심지어는 취미생활을 포기하고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치코밍하고 있는 필자. 비치코밍은 취미이자 발룬티코노미스트적 삶의 실천이다. /사진=한익종
비치코밍하고 있는 필자. 비치코밍은 취미이자 발룬티코노미스트적 삶의 실천이다. /사진=한익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취미생활을 지속하고 있거나 다른 취미생활에 또 도전하는 독자들은 왜 있는가? 취미생활을 하면서 가졌던 쓴맛, 시린 맛, 불쾌한 냄새 뒤에는 달콤함과 향기로운 경험이 있어서 아니겠는가.

본질적으로 취미는 아무 맛도, 아무 냄새도 없다. 우리가 취미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느끼고 즐기기 때문이다. 뒤집어 얘기한다면 취미는 오묘한 맛과 향기를 지녔다고도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의 차이이다.

현재 취미가 달고 향기롭다고, 그것에 매몰되다 보면 반드시 낙담의 시간이 온다. 결과적으로는 쓴맛이다. 현재 취미가 힘들고 쓴맛이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달성하는 데서 오는 희열을 느낀다면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취미는 달고 향기로울 것이다. 

삶은 어떤가? 인간의 삶은 어떤 향기와 어떤 냄새를 지녔을까? 경험해 보고 생각해 보니 삶도 취미생활과 같더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쓸 수도, 달 수도 있다. 그런 결론에서 탄생시킨 취미, 삶의 자세가 발룬티코노미스트 적 삶이다.

발룬티코노미스트로서의 삶은 향기롭고 맛있는 삶이다. 그러나 이 삶은 달콤하기만 한 건 아니다. 때로는 쓴맛도 느끼고, 아리고 시린 맛도 느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남는 맛과 냄새는 달고 향기롭다.

어떤 때는 언덕을 올라야 하고 어떤 때는 계곡을 헤맬 때도 있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가슴 아림도 겪어야 하고, 나보다 나은(경제적, 명예, 지위 등) 삶들로부터 오는 유혹도 견뎌내야 한다. 그러나 발룬티코노미스트의 삶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를 전제로 하기에 외롭고 낙담스럽지만은 않다.

업사이클링 수업을 하고 있는 필자. 발룬티코노미스트가 봉사와 경제활동을 추구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사진=한익종
업사이클링 수업을 하고 있는 필자. 발룬티코노미스트가 봉사와 경제활동을 추구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사진=한익종

발룬티코노미스트는 직업이 아니다. 직업군이다. 삶의 가치다. 그것이 어디 인생 후반부를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가져야 할 덕목이며 가치랴.

나는 오늘도 발룬티코노미스를 취미로 한 삶을 즐기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 나아가서는 인류 사회가 봉착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취미로서의 발룬티코노미스트 적 삶이 꼭 필요하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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