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유럽 미술관 여행 가려고 신화 공부
임윤찬 덕분에 뒤늦게 시작한 덕질
시험 없고 숙제 없는 배움의 희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려면 뭘 좀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줄 알았어.”

평생 클래식 연주회를 자발적으로 찾은 적이 없던 친구였는데 임윤찬 덕분에 뒤늦게 덕질을 시작했다며 털어놓은 고백이다. 우연히 노래 하나를 들었는데 가슴이 저미는 것 같고 그 가수가 임영웅이더라는 얘기는 어쩌면 놀랍지도 않은 스토리일 테지만 피아노나 오케스트라 연주는 들으면 지루하고 졸렸다는 사람이 임윤찬 때문에 클래식에 빠졌다는 전개는 사실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경우는 아니었다. 

2년 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이후 아침부터 잘 때까지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자동 재생한다는 사람이 많다. 태어나 처음으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 중에 클알못(클래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의외적 덕질 입문 고백이 줄을 잇더니 올해 임윤찬 콘서트는 예매를 시작하자마자 서버를 다운시키고 1분 만에, 50초 만에 매진 사례를 기록한다.

고정적인 클래식 애호가들만 있었다면 절대로 만들지 못할 신드롬이다. 클알못에서 극성 덕질파의 한 사람이 된 내 친구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드롬의 중심에는 아마도 인생 2막을 맞이한 중장년층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쓸모 있는 것’에 매달려 열심히 돌아야 했던 인생 1막을 마치고 난 후, 나는 누군가, 삶의 진짜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자문하게 되는 때가 되면 신기하게도 그 ‘쓸모 있던 것’들이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던가. 쓸데없고 쓸모없던 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구한다는 사실을 ‘인생 초창기에는 영수국, 중반에는 사경과, 결국엔 음미체로 끝나게 되어있다’라는 알 듯 모를 듯 찰떡 비유로 들려준 사람도 임윤찬 극성팬이 된 내 친구다.

갸웃거리는 내게 그는 풀이를 들려줬다. “어렸을 때는 공부를 잘하는 게 최고잖아. 영어 수학 국어 같은 주요 과목이 전부지. 사회에 나오면 사회 경제 과학 과목 정답을 맞히듯이 살 수밖에 없고. 그러다가 인생을 마무리할 때가 되면 음악 미술 체육, 몸으로 감각하는 것이 최고더라고.”

그리스 유적이 많은 터키의 제우스 신전 /게티이미지뱅크
그리스 유적이 많은 터키의 제우스 신전 /게티이미지뱅크

음미체 이론에 감화된 사람들이 제법 많아서 그들은 새롭게 자기 안의 예술가를 다시 만나고 있다. 30년 동안 공학대학 교수로 지내고 퇴직한 선배 한 분은 잊고 있던 화가의 꿈을 찾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고 악보를 볼 줄도 모르던 한 친구는 동양 악기 해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평생 3보 이상 승차를 부르짖으며 자동차 생활을 영위하던 내가 두 발로 걷는 도보 여행가로 살기로 한 것도 인생 2막 음미체 경우에 해당한다. 

인생 2막, 3막을 위해 새로운 자격증을 따고 더욱 견고한 경제 활동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고, 더러는 <돈이 되는 주식투자>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른바 우리 음미체 종족은 쓸모없는 것의 정점에 있는 신화 수업을 함께했다.

유럽 여행 중에 미술관에 가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화들의 장면을 제대로 알고 싶다는 한 친구의 제안으로 우리는 좋은 선생님을 찾았고 여행지에 깃든 이야기를 알고 싶어서, 그림을 제대로 만나고 싶다는 다분히 사치스럽고 쓸데는 없는 오롯한 이유로 공부를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할머니들은 왜 옛날얘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하셨을까? 어쨌든 우리는 좋아함을 넘어 진지하게 공부까지 하고 있으니 현실적인 눈으로 보면 가난하게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셈인 건가?

이탈리아 베로나에 있는 단테의 동상 /게티이미지뱅크
이탈리아 베로나에 있는 단테의 동상 /게티이미지뱅크

그리스 로마 신화를 공부하면서 조금이나마 신화가 그저 허무맹랑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 욕망과 무의식의 근원에 닿는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우주의 법칙, 인간과 인생, 운명과 나 자신에 대한 질문에 어렴풋한 가닥을 찾아가는 느낌이니까.

얼마 전부터는 단테의 <신곡> 수업까지 이어 하고 있다. 임윤찬 덕질의 세계로 들어간 친구 덕분이었다. 임윤찬이 콩쿠르 우승 후 귀국 간담회에서 ‘단테의 신곡’은 여러 출판사의 번역본을 모두 구해서 읽었고 전체를 외우다시피 할 만큼 읽은 책이라고 언급한 것이 계기였다.

10대의 피아노 연주가가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를 연주하기 위해 열두 번이나 읽었다는 신곡을 함께 읽으며 깨달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도저히 읽히지 않는 책이었겠구나. 신화에 등장하는 이름은 어렵고 도저히 신들의 이야기라고 믿기 힘들 만큼 때로는 추악하고 잔인하며 변덕스럽고 허무맹랑하다.

신들의 이름과 이야기를 모두 외울 만큼 읽는다고 해도, 유럽으로 에우로페(Europa)라는 이름의 여인을 떠올릴 수 있다고 해도 한 푼어치 이득이 되지는 못할 것이지만, 친구를 배신한 사람들의 배신 지옥, 톨로메아에는 영혼을 지옥에 떨어트리고도 악마화한 육신으로 현세에서 여명을 누리며 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치를 떨면서 우리는 시험이 없고 숙제가 없는 공부의 희열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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