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유럽에서 주차하기 챌린지
파란 헤드폰을 한 코끼리 분수
낫 놓고 기역 자, 진품 두고 진품 찾기
“지도를 보니까 샹베리(Chambery)를 지나. 들러도 좋을 것 같아.”
비가 많이 오니 최대한 이탈리아로 이동하는 게 낫겠다는 미 선배의 의견은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뭐 급할 게 있다고? 라는 후니의 정리로 끝났다. 지금은 주목받지 못하는 곳이지만 샹베리는 오랫동안 프랑스 사부아 지역의 역사적인 수도 역할을 했다. 그냥 지나긴 아쉬우니 공기만이라도 느끼기로 하고 방향을 잡았다.
"우리 바보인가 봐. 도대체 왜 이렇게 헤매는 거야?”
셋이 돌아가며 시도했고 모두 실패했다. 주차정산기 앞에서 끙끙대다 자괴감에 빠지다니. 유럽을 여행하면서 도심에 주차하는 일은 커다란 난관이다. 요금이 비싸더라도 주차 타워나 주차장이 안전한데 시내에 주차장은 별로 없다. 눈치껏 빙빙 돌면서 주차면을 찾아야 했다.
시내에 차 가지고 다니지 말라! 고 외치는 도시에서 공간을 찾는 일도 만만치 않지만 의외로 더 문제가 된 것은 그 후다. 어쩌면 그렇게도 지방마다 다른 요금정산기를 사용하는지···. 단 한 번도 똑같은 정산 시스템을 만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떤 것은 현금만 되고 어떤 것은 카드만 받고, 요금 정산 방식도 미묘하게 모두 달랐다.
예를 들어 주차 예정 시간만큼 미리 결제한 후 영수증을 보닛에 올려 두거나 아니면 선금으로 1유로나 2유로만 미리 넣은 후 사후 정산을 하는데 정산 기계도 가는 곳마다 달라서 '번호 입력'이라고 된 화면에 차 번호 뒷자리를 넣게 되어있는가 하면 어디는 생뚱맞게 주차면에 적힌 번호를 넣어야 하는 곳도 있고 이 모든 경우의 방식이 골고루 얽혀있다. 몹시 헷갈린다. 아··· 옛날이여. 주차 요금 정산원이 있던 시절이 그리웠다.


처음 한두 주가량은 이렇게 다르게 돌아가는 시스템과 이유를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를테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면 완전히 다른 방식을 배워야 주차 정산을 하는 식이다. 강원도에 가서 서울서 하던 대로 주차장을 이용하다 의도치 않은 요금 미납으로 벌금을 낸다거나 그 후로 범법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끙끙대다가 결국 다른 이용객이 나타나 시범을 보여주기만 기다리는 신세다. 노화에 의한 인지능력 혹은 눈치 능력 저하라고 자조하며 헤맴의 시간을 겪었다.
얘기가 옆으로 새는 느낌이지만 주차정산기뿐 아니라 사실 이탈리아에서 동일한 세탁기와 건조기를 만난 경우도 거의 없다. 대체 세탁기, 건조기에 뭐 별다른 동작 방식이 있겠냐, 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세제 넣고 동작~ 우리도 이렇게 간단한 방식을 생각했지만 캠핑장에서 숙소에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좌절시킨 세탁기와 건조기, 세탁건조기 작동 실패 사례만 얘기해도 한 시간이 넘을 것이다. 언젠가 세탁기와 건조기 모델을 모두 공개해 볼 생각이다.
하여튼 40일 동안 새삼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중앙통제적 일괄적 방식에 익숙한지 깨달았다. 시스템은 말할 것도 없고 사용하는 물건도 지방마다 다르다. 몇몇 대기업의 제품으로 통일된 사용 환경이 익숙한 사람으로서 매번 다른 시스템과 기기를 마주해야 하는 상황은 신기하면서도 고생스러웠다.
최초의 주차와 정산의 난관을 샹베리에서 겪었다. 번역기를 돌리고, 상상력을 동원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는 우여곡절 끝에 알아낸바, 여긴 60분 이상 주차금지다. 1시간 단위로 끊어서 둘러보기로 하고 동선을 짰다.
‘엉덩이가 없는 녀석들’이라는 별명이 붙은 코끼리 분수는 첫눈에 유쾌하다. 네 마리 코끼리가 탑 기둥에 끼어 있거나 사방으로 탈출하려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 마리는 헤드폰을 끼고 있다. 샹베리 출신 장군이자 탐험가 베누아 드 보아니라는 사람을 기리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와 코끼리는 너무 연관성이 없는 거 아냐?”
“인도에서 무지막지한 부를 축적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대. 샹베리에 엄청나게 기부한 거 아닐까? 그러니까 인도를 상징하는 코끼리까지 동원해서 탑과 분수를 만들어 줬겠지.”


코끼리들이 엉덩이를 맞댄 탑 기둥 위에 맨 위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다. 1838년에 세운 코끼리 분수는 이제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헤드폰 코끼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었다. 토리노 수의를 보관했다는 성당이라 방문 가치가 있다지만 사실 샹베리처럼 작은 도시는 오래된 골목이 아름답다.
굳이 관광 명소라고 불리는 것을 찾아가느라 오래된 도시의 좁은 골목길을 서둘러 지나친다면 애석한 일이다. 비 오는 날 샹베리 도시 골목길이 한산하다. 고요함을 선물 받은 성당이자 박물관인 샹베리대성당 마당을 가로질러 관광 열차가 지났다.
“날이 좋았으면 예뻤겠다. 오늘 같은 날엔 사진은 망했지, 뭐.”
사진작가 후니는 아쉬운 눈치였지만 쨍한 날씨의 북적이는 샹베리와 비 오는 날의 고요한 샹베리 중에 고르라면? 난 다시 비로 젖은 날의 한산함을 선택할 것 같다.
“중세의 이콘부터 14세~15세기의 이탈리아 유화까지 컬렉션이 너무 좋대.”
내가 마음에 둔 장 자크 루소의 생가는 시내에서 떨어져 있어 포기하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현대적이고 말끔한 건물, 미술관에는 대작 이콘과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단박에 나를 사로잡은 것은 유디트다. 마티아 프레티(Mattia Preti)가 그린 유대인 여자 영웅 유디트는 적장의 목을 자른 후 피가 떨어지는 머리를 쳐들고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유디트 그림을 보면 난 번번이 조선의 논개가 떠오르더라.”
“맞아. 너무 비교되는 방법이야. 하나는 적장을 죽이려고 내 목숨을 내놓고 하나는 저렇게 과감하게 목을 쳐버렸네.””
주제, 구도까지 웅장하고 압도적인 그림이지만 어쩐지 색채가 너무 선명하다. 1600년대 그림이 이렇게 선명할 수 있을까? 감탄을 누르며 의심이 솟아올랐다. 유명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봤던 명화의 느낌이 없다. 루브르와 프라도,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오래된 명화에는 세월이 흐르며 만들어진 색채가 있었다. 이를테면 잘 익은 밤색의 세월 먼지와 세심한 변색의 코팅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세월의 무게가 없다.
“대단한 작품은 맞는데 이것들 왠지 진품은 아닌 거 같지?”
눈치를 보며 속삭이는 순간 미술관 표찰을 걸고 있는 여인이 나타났다.
“실례합니다만··· 여기 전시 작품들 가운데 진품도 있나요?”
“우리 미술관에 진품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색이 너무 선명하고 표면이 매끄러운데··· 모두 오리지널이라구요?”
“네. 모두 최첨단 기술로 복원처리를 거친 진품이에요.”
모화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 시들하게 팔을 타고 내려가던 감동이 다시 올라왔다.
“어쩐지! 그림이 막 끌어당기더라니. 앞을 떠나기 힘들더라고.”
“어머머~ 진짜니 아니니 하더니 이런 허세 너무 웃기거든.”
그림이 좋으면 그냥 감탄하면 될 것을 감상 대신 진품인지 아닌지 따져야 직성이 풀리다니. 사람들은 감동을 주는 예술품에 자격을 묻는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AI로 완전히 복원한 후 똑같이 모화를 만들어낸다면 진품과 모화 사이의 차이는 세월뿐 아닌가? 사람들은 오리지널과 모화 사이에 차이를 느낄까? 그때에도 오리지널만이 주는 감동이 있을까? 문화 스노브이니 허세니 하면서도 뼛속까지 속물인 나는 모든 전시품이 진품이라는 응답이 기뻤다.


“4백 년 전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바로 그 색채 그대로 우리가 보고 있는 거네.”
과학 전공자 이를테면 이과생 미 선배는 기술에 더 감동한 눈치다. 나도 첨단기술 덕에 생생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좋은데··· 좋으면서도 어쩐지 세월이 주는 감동은 사라져 버린 느낌이 아쉽고 서운하다. 낡고 색이 바랜 명화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지만 과학적으로 정교하고 섬세하게 복원된 그림과 세월의 때와 먼지를 입은 채로 낡은 그림, 그중에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다. 복원 기술에 감탄하는 미 선배, 후니와 나는 조금 다른 의견이다.
“새것, 깨끗한 것, 선명한 것도 좋지만 색이 바랜 것도 좋아. 기름에 먼지가 섞여 갈라진 표면은 수백 년의 세월을 보여주는 것 같잖아.”
내 삶에도 새롭고 힘차고 선명하던 것들이 희미하다. 경쾌함을 덮은 어눌함과 뒤섞인 혼탁함은 살아낸 흔적과 역사려나. 깨끗하게 복원된 그림을 마주했을 때 오히려 말끔하지 않아서 좋은 것들을 떠올렸던 것처럼 흐릿하게 흐너지는 것들이 모두 귀하다는 마음이 불쑥 솟는다. 고급 인센스 향이 비릿한 내음을 가리는 미술관 로비에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밝고 화려한 것만큼 낡고 희미해지는 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다고. 그래도 비는 좀 그쳤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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