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뉴질랜드 그레이트 웍스의 케플러 트랙
성스러운 땅 순례, 손터링(Sauntering)
온전한 트래킹의 즐거움 위해 만든 길

뉴질랜드에는 3000m급 높은 산이 많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등반가를 많이 배출했고 일상적 등산 애호가도 많지만 정상을 향한 등산과 구별하여 산 주변을 산책하듯 자연을 향유하며 걷는 트램핑(Tramping)으로 유명하다.

케플러(Kepler) 트랙은 피오르드의 대표 경관을 보여주는 숲과 높은 산, 깊은 계곡을 모두 향유하며 걷는 루트이다. 뉴질랜드의 장거리 하이킹 트랙은 대부분 원주민이 금보다 귀하게 여겼던 녹옥, 그린스톤(Green stone)을 채취하던 루트이거나 초기 개척자들의 탐사 길을 따라 걷는 형태지만 케플러는 온전히 트래킹만을 위해 1988년에 조성된 코스다. 터석(Tussock)으로 덮인 고원지대와 거대한 산줄기, 빙하가 깎아낸 계곡과 호수를 내려다보는 전망이 넋을 잃게 한다. 

한가롭게 산책하듯 걷는다는 뜻의 손터(Saunter)는 중세 시대 성스러운(Sainte) 땅(terre)을 향해 걷던 순례에서 유래한 말이다. 현대 트램핑의 시조 격인 19세기 미국의 자연주의자 존 뮤어는 산으로 들어가 걷는 것을 손터링으로 규정했다. 단순히 온 힘을 다해 걷고 오르는 육체적 행위만이 아니라 몸과 정신이 결합되는 순례와 같은 것이라고. 나는 이번 걷기 여행을 트래킹이나 하이킹이 아니라 손터링이라고 정의한다. 자연의 거룩함을 존중하고 땅의 에너지와 하나가 되어 걷기로 다짐하며 손터링을 시작한다.

뉴질랜드 피오르드랜드의 케플러 트랙 /사진=박재희
뉴질랜드 피오르드랜드의 케플러 트랙 /사진=박재희

레인보우리치에서 출렁다리를 지나면 파르스름한 향기가 밀려오는 숲으로 들어서게 된다. 기습적으로 청량한 입자가 몽글몽글 피부에 와서 닿는다. 와이라우(Wairau)강을 따라 이어지는 계단형 지형을 걷는 동안 피오르드랜드 숲길의 전령인 이끼와 너도밤나무(beech)를 만나게 된다. 깊은 숲길의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조각 햇살이 빼곡하게 자라는 이끼식물을 비추었고 우리는 탄성을 지르며 폭신하게 자라는 고사리 숲을 지났다.

첫날은 6km가량의 평탄한 짧은 여정이다. 나뭇잎이 덮어 푹신하게 느껴지는 친절한 트랙을 따라 걸으며 배낭의 무게에 적응하는 날이다. 모투라우(Moturau) 산장으로 가는 길에서 방문자에게 처음 나타난 뷰포인트는 케플러 습지다. 아름다운 나무데크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앞으로 펼쳐질 겹겹의 산봉우리와 빙하가 녹아내린 호수가 방문자를 맞아준다. 

모투라우 산장은 마나포우리(Manapouri) 산중 호숫가에 있다. 짐을 풀고 호수로 나가 바위가 만들어진 자연 수영장을 발견했다. 알몸 수영을 시작으로 앞으로 나흘간 전기도 와이파이도 샤워도 할 수 없는 야생의 생활에 신고식을 치렀다. 10시까지 해가 지지 않는 남반구의 여름밤이 시작되는 일몰을 실감하며 샌드플라이(흡혈파리)를 피해 침낭으로 들어갔다. 갈색 키아 새의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잠시 깨었다. 하늘에는 오리온 별자리가 시리도록 파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나포우리 호수를 핑크빛으로 물들이며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야생 트램핑의 가장 중대한 과업은 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준비해 온 누룽지와 오트밀로 식사를 마치고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완만하다고는 해도 두 번의 오르막을 넘어 16.2km 산길을 가야 하는 날이다. 두툼한 피타브레드에 초콜릿과 꿀, 치즈와 살라미에 잼까지 우리가 태워야 할 연료를 채워 넣었다.

호수를 따라 이어진 저지대 숲길은 온전히 고사리의 세계였다. 어른 어깨높이까지 자라는 고사리와 커튼처럼 이끼를 매달고 있는 너도밤나무들이 빼곡한 오르막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숲을 울리는 새소리에 턱에 차오르는 숨소리가 섞이는 것을 들으며 꾸준히 올랐다. 햇살마저 어깨를 좁혀야 겨우 들어설 수 있는 깊은 숲에서 나무등걸에 앉아 쉬면서 땀을 닦으니 덕지덕지 붙어있던 일상의 번뇌가 함께 떨어져 나간다. 

아이리스번(Iris Burn) 산장까지 6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6시간을 허덕이며 올라왔을 때 빅슬립(Big Slip)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산맥의 절개지를 만났다. 1984년 폭우로 산사태가 만들어낸 빅슬립 주변은 까마득하게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까마득한 산봉우리가 이어진다.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고 누구와 경쟁하는 것도 아니다. 발목까지 자라난 민들레 꽃밭에 앉아 쉬었다. 만년설을 눈썹까지 덮은 어마어마한 산을 마주 보며 다시 숲으로 들어서 두 시간여를 소풍처럼 걸어 아이리스번 산장에 도착했다. 

머리가 좋고 힘도 세기로 유명한 뉴질랜드 키아(kea) 새 /사진=박재희
머리가 좋고 힘도 세기로 유명한 뉴질랜드 키아(kea) 새 /사진=박재희

잭슨피크(Jackson Peas)와 케플러산 가운데 깊은 계곡이 시작되는 위치에 있는 산장 앞 너른 벌판은 금빛 햇살이 물결치고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서 고원지대의 터석(Tussock)이 빛을 가득 품고 일렁이며 바람을 타고 춤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찔끔. 완전하게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슬리퍼가 사라졌다. 뉴질랜드 남섬의 높은 삼림지대에 사는 앵무새의 일종인 키아(Kea) 짓이었다. 키아는 호기심이 많고 머리가 좋은 새로 명성이 자자하다. 사진을 찍으려 다가오는 사람을 조금씩 움직이며 유인해 낸 후에 배낭을 열어 먹을 것을 가져가기도 하고 호기심으로 등산화나 등산스틱을 물어가기도 한다. 터석에 넋을 잃은 동안 톡톡히 신고식을 치렀다. 나를 비롯해 신발이나 옷을 도둑맞은 사람들은 웃음반 절박함 반으로 산장 주변을 살폈다. 녀석이 터석 사이에 던져놓은 슬리퍼를 찾았다.

케플러 트랙의 하이라이트의 날인데 난 아이리스번 산장을 떠나기 아쉬웠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터석이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가장 멋진 풍광이 펼쳐지는 날이지만 해발고도 1000m 차가 나는 봉우리를 두 개씩이나 넘어 14.6km를 걸어야 하는 날이라 아침 채비를 단단히 했다. 산장을 출발하면 고사리가 나무처럼 자라는 숲이다. 고사리와 너도밤나무 이끼풀까지 울창한 숲 위로 가끔 빼꼼하게 하늘까지 솟아있는 산이 보인다. 

힘에 부친 세 시간의 오르막 후 믿을 수 없는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온통 마음을 빼앗은 터석이 굽이굽이 이어진 산등성이로 이어져 펼쳐졌고 빙하 호수는 까마득하게 발밑에 있었다. 빅슬립에서 아득해 올려다보기도 힘들던 산봉우리에 눈을 맞추며 우리는 좋다, 너무 멋있다를 반복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말은 딱 두 가지였다. “좋다. 너무 좋다.” 그리고 “멋있다. 너무 멋있다.”

뉴질랜드 트래킹_케플러 트랙 /사진=박재희
뉴질랜드 트래킹_케플러 트랙 /사진=박재희

럭스모어(Luxmore) 산장에서 하늘을 향한 계단처럼 아찔한 절벽 위로 솟은 뾰족한 산등을 타고 올라갔다. 행잉밸리 대피소(Hanging Valley Shelter)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다. 테아나우 호수를 따라 내달리는 산줄기, 자연이 연출하는 위대한 장면 앞에서는 그나마 두 가지 말조차 잃고 터져 나오는 탄성을 지를 뿐이다. 그날은 마주치는 모든 곳이 최고의 경관이었고 계속 더 멋진 광경에 넋을 잃었다.

케플러에는 10일 중 9일이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내가 걷는 나흘간 내내 일기가 믿을 수 없이 좋았다. 포리스트번 고개(Forest Burn Saddle)를 지나 테아나우 호수 건너편 멀치슨 산맥(Murchison mountains)의 웅장한 자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했다. 오후를 가득 채워 받은 경이의 풍경이 1472m의 럭스모어산 정상의 등성이를 지날 때까지 이어진다. 쏟아지는 따스한 저녁 햇살을 흡수하며 럭스모어 산장에 도착했다.

케플러 트랙에서 손터링 /사진=박재희
케플러 트랙에서 손터링 /사진=박재희

마지막은 언제나 아쉽다. 클라이맥스를 경험했고 배낭과 피로마저 친숙해졌지만 케플러에서 여정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럭스모어 산장을 뒤로하고 타키티무 산맥과 스노든산, 얼 산을 아우르는 전망을 걸어 나오는 발걸음이 아쉬우면서도 벅차다.

수목한계선을 넘으면 석회암 벼랑으로 내리막을 지나게 된다. 현지 주민들이 가볍게 산책을 하고 물놀이를 하는 브로드베이(Brod Bay)를 통과해서 너도밤나무 일종인 레드비치 군락을 통과하는 총14km의 하산길을 마지막으로 몸과 마음에 집중한 나흘간의 60km 케플러 손터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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