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거래하고 있는 금융회사의 40대 차장이 면담을 요청한 적이 있다. 창구에서 거래를 마치고 그가 안내하는 응접실로 가서 차를 한잔 마시며 덕담을 나누는데 갑자기 말소리를 낮추더니 이제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싶다고 한다. 같은 업종에 근무한 경험도 있어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하기에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그는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 속에 정기적으로 주어지는 목표에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고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은퇴 후에 무얼 할 것인지 물었다. 그는 우선 세계 여행을 하며 심신을 재충전하고 싶다고 했다. 여러 사람이 은퇴 후에 하고 싶은 일로 여행을 꼽았는데 그도 역시 그랬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에게 맨날 여행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자칫 일시적인 감정으로 퇴직한 후 일을 다시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며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 무엇을 할 것인지가 구체화하면 그때 은퇴 설계에 관한 얘기를 다시 하자고 달랬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한참 후 금융회사를 방문했을 때 그가 겸연쩍게 “선생님, 직장생활을 더 하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해 서로 웃었다. 조기퇴직을 꿈꾸더라도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지 경제적 여유가 있다고 퇴직을 결정했다간 나중에 후회하기 쉽다.

하루는 퇴직 예정 공무원을 상대로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강연 도중 중간에 약간의 휴식 시간이 있었다. 한 사람이 자신은 은퇴하면 한동안 놀겠다고 한다. 그동안 직장생활을 하느라 마음고생이 많았다는 것이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다만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자칫 무기력한 상태에 빠질 수 있으니 휴식 기간을 미리 정해 놓는 게 필요하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강연을 마치고 주변을 정리하는데 서너 사람이 내 곁에 왔다. 개인적인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이 자신은 은퇴 후에 해야 할 일을 찾았다며 정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조기퇴직을 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미국 유학 중에 도서관을 찾았는데 우리나라 6·25전쟁에 관한 사료가 너무 부실하다는 걸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그 사료를 보완하는 걸 자신이 평생 해야 할 일로 정했다고 밝혔다. 한 마디로 감동적이었다. 남들은 은퇴하면 그냥 놀겠다는데 그는 우리나라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남은 생을 바치겠다는 것이다.

많은 직장인이 은퇴를 꿈꾸며 준비하는 일이 거의 재무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은퇴 후 경제적 자유를 얻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아무 준비 없이 퇴직했다가 무엇을 할지 몰라 그냥 무료하게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은퇴 후에 주어지는 여유는 정말 황금 같은 시간이다.

이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나중에 하늘에 올라 신께서 ‘얘야, 너는 내가 준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은퇴는 바로 이런 답을 구하는 시기다. 주변을 찾아보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다만 그것들은 할 일을 찾는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영국의 조각가 헨리 무어는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로 모든 것을 쏟아부을 무언가를 찾으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과제가 당신이 도저히 완수할 수 있을까 고민할 정도로 힘든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완수하면 그만큼 보람이 클 것이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뒤에 올 사람이 당신이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의 역사는 이런 과정이 수만 번 이루어진 것인데 당신은 그 다리를 놓은 것이다. 그것보다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