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재의 국제금융 인사이트]
美 고용 과열 속 파월 잇단 비둘기 발언
시장 오판 자산가격 반등 초래 우려
섣부른 긴축 완화, 더 큰 고통 수반해

2017년 방영된 KBS 드라마 스페셜 ‘강덕순 애정 변천사’를 보면 시골 처녀 덕순은 경성으로 유학 간 동네 오빠 석삼을 짝사랑한다. 덕순의 사랑이 부담스러웠지만 모질게 거절하지도 못했던 석삼은 ‘나를 찾지 말라’는 쪽지를 건네주고 훌쩍 서울로 떠난다.
글을 읽지 못했던 덕순은 그 쪽지에 석삼의 주소가 적혀있을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무작정 상경하지만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곤욕을 치르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독립운동가들을 돕게 되고 글도 배우지만 그녀는 석삼이 이미 친일파의 딸과 결혼한 상태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이렇게 오랜 기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애정사는 진의에 대한 곡해와 착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곡해는 의사를 전달하는 상대방이 힘센 자일수록 더 심하다. 편안하게 진의를 물어보기가 어렵거나 속여도 될 만큼 상대에게 관심이 없을 때가 그런 경우다.
현재 세계 금융시장은 지난 2월 1일 연방준비제도(연준) 공개시장위원회(FOMC) 직후에 열린 기자회견과 엿새 후 워싱턴 경제클럽 간담회에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행한 발언의 진의를 둘러싸고 열띤 공방을 벌이고 있다.
그의 발언 중 핵심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 인플레이션 감속)’이다. 파월 의장은 2월 FOMC 회의 후 10여 차례 반복해 디스인플레이션을 언급함으로써 그가 마치 인플레이션은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닌 듯이 여긴다는 인상을 주었다. 물론 그의 발언 후에 주식시장은 크게 올랐고 채권 금리는 내렸으며 달러도 내림세를 탔다.
그런데 시장 참여자들을 더욱 의아하게 한 것은 파월 의장이 미국의 1월 고용시장 데이터가 초강세로 발표된 직후에 열린 간담회에서도 여전히 디스인플레이션이라는 단어를 수차례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전문가가 충격적인 고용시장의 초호황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거세질 것이고 연준이 더욱 매파적으로 변할 것이라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왜 파월 의장이 저렇게 비둘기성 발언을 반복하는 것일까’에 대하여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가 진정 인플레이션이 다 잡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나 이유가 있는 것인지 설왕설래가 한창이었다.
왜냐하면, 파월 의장은 불과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물가 잡기에 실패해 1970년대 미국 경제를 스태그플레이션의 함정에 빠뜨렸다고 비난받는 ‘아서 번즈’ 전 연준 의장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경기 침체를 감수하고라도 인플레이션 퇴치에 집중해야 한다는 초강력 매파적 메시지를 연달아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파월 의장의 ‘디스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는 발언은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인플레이션을 재는 대표적 지표인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의 전년 대비 상승률이 작년 6월 9.1%를 고점으로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월 대비 하락 폭도 0.6% 안팎으로 견조하게 유지되고 있다. 물가는 오르고 있지만 상승 각도는 최근에 확실히 꺾였음을 보여준다.
파월 의장이 디스인플레이션에 무게를 두는 이유는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주는 세 가지 요소 가운데 두 가지 부문에서 긍정적인 신호가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팬데믹으로 망가졌던 글로벌 공급망이 개선되면서 상품, 완제품 등 재화(goods) 부문의 가격이 크게 안정되었다.

둘째로, 케이스-실러 지수나 평균 주택 판매가격의 추이가 보여주듯이 작년 6월경에 고점을 찍은 부동산 가격과 월세가 하락하면서 주택(housing) 부문의 디스인플레이션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뚜렷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커졌다.
셋째로, 주택부문을 제외한 서비스(service) 분야에서는 여전히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서 고착화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초강세를 보이고 있는 미국 고용시장에서의 임금 상승 압박은 인플레이션 퇴치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런데 파월 의장은 사실 재화부문의 디스인플레이션은 곧 지나갈 수 있음을 시사했다. 즉, 재화부문에서는 일시적(transitory) 디스인플레이션이 현실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재화부문에서 물가가 안정세를 보이는 가운데 주택부문의 디스인플레이션이 서비스부문의 물가 상승을 제어하면 경제 전반에 물가 상승 압력이 상당히 해소될 것이라 보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그의 견해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최근 원유, 휘발유 그리고 디젤유의 재고량이 평소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올겨울 미국에서 도로 결빙 등 기상재해와 경기 침체 우려로 수요가 감소하면서 기름값은 안정세를 나타내고 있지만, 낮은 재고와 부족한 공급으로 인해 계기만 주어지면 유가는 언제든지 상방으로 치솟을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제로코로나로 봉쇄됐던 중국 경제의 재개와 인도의 고성장은 중장기적으로 수요 부문의 유가상승 촉매제로 작용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재화부문에서 인플레이션이 다시 가속화해 주택부문의 디스인플레이션을 희석하게 된다. 이로 인해 디스인플레이션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인플레이션은 높은 상태를 유지하거나 추가로 상승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여기에다 경제에 대한 파월 의장 자신의 안이한 현실 인식이 디스인플레이션을 끝내고 악성 인플레이션이 다시 고공 행진할 빌미로 작용할 수도 있다. 자신이 디스인플레이션을 언급하는 순간 주식을 비롯한 위험 자산의 가격이 폭등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월 의장이 주가와 위험자산 가격의 폭등을 보면서도 반복적으로 디스인플레이션을 언급하는 것은 그가 실제 비둘기로 변신했기 때문이 아니다. 연준이 긴축정책을 끝내고 완화정책으로 전환되는 피벗(pivot)으로 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단지 주가와 자산 가격의 급등이 경제에 어떻게 효과를 미치는지 그 메커니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연준의 비둘기성 메시지로 주가가 급등하면 가계의 자산 가치가 늘어나 가계는 물가 상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적 소비 행태를 지속하게 된다. 이런 부의 효과가 물가를 더 밀어 올리게 되고 자산시장에 빨라진 돈의 흐름이 실물경제로 전이해 물가에 기름을 붓게 된다.
실제로 1970년 초 인플레이션이 6.4%에 달하자 연준은 금리를 7.9%로 올렸다. 그런데 물가가 3.2%로 하락하자 금리도 5.8%로 내렸다. 그러자 주가도 20%가 넘게 폭등했다. 그 여파로 물가는 디스인플레이션을 보인 지 6개월이 지나 상승 전환했고 2년 후 두 자릿수로 급등했다. 지난 몇 개월간 물가상승률이 둔화하였다 하여 인플레이션이 끝났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성재 가드너웹대학교 경영학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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