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미의 보석상자] (33)
30년만에 작업실에서 시작한 소반 만들기
옻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인내의 작업
자개와 옻칠의 조화는 우아한 기품으로 바껴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송충이가 갈잎을 먹으면 떨어진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지난 30년간 나는 갈잎을 먹어 왔나 보다. 오랜만에 옻칠로 소반(小盤, 자그마한 밥상)을 만드는 작업실에 돌아와서,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나의 작품을 보며 우리 전통의 매력에 더욱 빠져들고 있다.
작업실에 진열된 선생님이 만든 소반처럼 매끈하게 만들고 싶지만 손과 기술이 따라주지 않는다. 의욕만큼 작품의 완성도가 올라가지는 않지만 만들어가는 시간이 즐겁다.
30년 만에 다시 시작한 작업. 서로재(북촌의 한옥 이름)의 작업실 테이블은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창작품이 매일 만들어지는 곳이다. 그 테이블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사포치기를 하면, 날리는 먼지에 옷과 머리가 하얗게 된다. 먼지가 눈에 들어가 눈물이 나기도 하고, 옻 독이 올라 온몸이 가렵고 발진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난관은 점점 드러나는 그럴듯한 작품의 자태를 보면서 작은 보람으로 바뀐다. 손끝으로 감촉을 확인하며 옻칠이 잘 먹을 수 있는 바탕을 만들기 위해 사포질을 하고, 옻칠을 입히고 그 위에 다시 사포질을 반복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나는 송충이가 아닌 ‘옻충이’인가?
필자가 옻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엄마의 혼수품이던 자개장롱 때문이다. 지난 7월 24일 여성경제신문 ‘55년 전 엄마의 혼수품이던 자개장롱 대이동 작전’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소개한 대로 필자는 오래된 자개장롱을 보관하고 있다.
참 의아했다. 사람이 살지않는 시골집에, 23년 동안 방치되다시피 했던 자개장롱의 상태···. 사용상의 닳은 흔적, 가구 이동으로 인한 모서리 찍힘 등 흠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상태는 너무나도 양호했다. 칠이 뜬 곳도 없었고, 자개가 떨어져 나간 부분도 없었다. 자개장롱 안에는 외할머니가 사용하시던 이불, 한복 등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버리기가 아까울 정도로 멀쩡했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다.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옻칠 수업을 들으며, 옻칠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우리 전통 옻칠의 우수성을 새삼 알게 됐다. 옻칠을 하면, 목재 안으로는 옻칠이 스며들고, 목재 위로는 비닐처럼 얇은 막을 형성하게 되어 코팅 효과를 내기 때문에 방수와 방습 효과가 좋은 것이었다.
옻은 방충, 방부, 절연의 효과가 뛰어나 예로부터 가구, 칠기, 공예품 등에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러한 우수성이 높이 평가되어 해저 케이블 선, 선박, 비행기 등의 산업용 도료로도 사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독일에서 생산되는 벤츠 자동차에 옻칠을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나는 이런 옻칠의 우수성을 23년간 방치되었던 자개장롱을 통해 체감한 셈이다. 그 자개장롱을 보면서 학창시절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손으로 물건을 만들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혹시 내가 옻칠을 배운다면···.
‘엄마의 자개장롱을 내 손으로 직접 보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와 소박한(?) 혹은 원대한 꿈을 갖게 됐다. 그걸 실험해 보기 위해 나성숙 옻칠학교의 ‘나전 소반 만들기’ 강좌를 수강하게 됐다. 수업을 시작한 지 한 달여가 지난 지금, 자개장롱은 옻칠을 입히고 말리는 과정이 필수이며, 자개는 조각 하나하나를 손으로 붙이게 된다. 여러 차례 반복되는 고된 작업과 긴 시간을 통해 탄생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나전 소반 만들기 4회차 수업에서는 옻칠한 삼베 위에 자개를 붙였다. 어떤 모양으로 자개를 붙일지 고민하다가, 첫 작업인 만큼 난이도가 낮은 것으로 선택했다. 자개의 종류와 붙이는 기법은 무수히 다양하다. 그중에서 초보자가 감당할 수 있는 자개 맛보기 정도로 목표를 정했다.

처음 붙여본 자개는 은은하면서 묘한 기품이 있었다. 또한 우아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자개의 깊은 아름다움과 옻칠의 품위있는 존재감이 어우러져 나의 미숙함을 모두 품어 감싸안는 듯 했다. 수업을 듣는 수강생 제각각이 개성을 담은 스타일로 완성했다. 나 또한 그랬고, 그러니 삼베 위에 내가 붙인 자개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는 없는 나만의 유일한 디자인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옻칠과 자개를 이용한 소반 만들기 수업을 들으며 요즘 이 말을 절감하고 있다. 지금이 나에게는 옻칠과의 달콤한 허니문인 것 같다. 작품으로 가득 찬 예술가의 작업 공간에는, 뿜어져 나오는 어떤 에너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에너지가 나를 ‘옻충이’로 변신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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