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효 실천사례 발표대회 보호자 부분]
호주에서 치매 걸리신 어머니, 정부의 각종 혜택 위해 한국으로 모셔

영락노인전문요양원 입소어르신 보호자 김정원 씨가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공부한다고 타국에 왔다가 결혼하고 정착해서 살면서 엄마와 한국을 그리워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엄마는 매년 계절이 반대에 있는 우리 가족을 찾아주셨습니다. 제가 아들 둘을 낳았을 때도 먼 길 마다하지 않고 11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와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 아들 둘이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고 남편과 저도 40대 후반을 맞이하면서 더 이상 혼자서는 찾아오시지 못하는 엄마를 그리고 할머니를 그리워합니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수년 전에 받고 투병 중이신 엄마. 외로움이 깊어지신 걸 내색하지 않으시고 옆에서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100세를 산다는 지금 시대에 70대 초반에 이 병을 맞으셨습니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시기 전에 엄마는 웃음이 많으시고 항상 고개를 뒤로 젖히고 ‘따발총’ 목소리로 웃으셨습니다. 사교성이 좋으셔서 처음 보는 사람과도 금방 친해지셨고 노래하는 걸 좋아하셨습니다. 그런 엄마가 말수가 줄어들고, 화를 잘 내시고, 자주 잠에 빠져 드셨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본인조차 모르게 우울증을 앓고 계시다가 텔레비전과 잠 속으로 숨어버리고 결국 알츠하이머 속으로 숨어버리셨습니다. 

사연 작성자인 김정원 씨와 어머니/사진=김정원
사연 작성자인 김정원 씨와 어머니/사진=김정원

늘 가족들의 건강과 안전을 걱정하셨던 엄마가 국과 찌개를 끓이실 때마다 생강을 과도하게 넣으셨고 모든 국과 찌개가 재료와 상관없이 생강국, 생강찌개가 되어버렸습니다. 한번은 아이들 용돈을 아무 말 없이 가져가셔서 왜 아이들 돈을 가져가셨냐고 조용히 여쭈었는데 절대 그런 적이 없으시다며 화를 내셨습니다. 20대 초반부터 평생 미용사로 일하며 생활력이 강하셨던 엄마였기에 딸에게 짐이 되기 싫으셨고 본인 혼자서 ‘그렇게’ 해결하려 하신 겁니다. 

결국 더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엄마는 친한 친구 가족이 주고 간 스탠드를 망치로 깨트려서 문밖으로 내동댕이쳐 놓으셨습니다. 그동안 엄마가 앓고 계신 병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그때서야 심각함을 인지했고 한국에 있는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비자 연장까지 해서 6개월 있기로 하셨던 엄마에게 한 달 만에 언제 한국으로 가시기 원하시냐고 물었던 매정한 딸을 지금은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영락전문노인요양원에서 안락한 삶을 보내고 계신 김정원 씨 어머니의 모습. /사진=김정원
영락전문노인요양원에서 안락한 삶을 보내고 계신 김정원 씨 어머니의 모습. /사진=김정원

엄마는 한국에서 정부의 여러가지 치매노인을 위한 혜택을 받으셨습니다. 호주보다 더 잘 되어있고 돌봐주시는 분들도 내 어머니처럼 생각해주시는 게 보였습니다. 너무 심하지 않으실 땐 사회복지사가 정기적으로 오셔서 엄마와 시간을 보내셨고 이후엔 주간보호센터에 매일 가셔서 종일 시간을 보내시면서 돌봄을 받으셨습니다. 시설로 오가는 노인들을 데려가고 데려다주는 서비스는 선 예약과 큰 돈을 내지 않는 한 세계 어디에도 없을 듯합니다. 

지금은 동생이 몇년을 대기자 명단에서 기다렸다가 연락을 받은 영락전문노인요양원에서 보호를 받고 계십니다. 그곳에서 다시 활기를 찾으신 엄마의 사진을 볼 때마다 너무 감격스럽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알츠하이머는 멈춰있습니다. 

엄마도 보통 사람처럼 아기로 태어났다가 다시 아기로 되신 거라 여깁니다. 육체적으로 도움을 받든 정신적으로 도움을 받든 모든 노인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죠.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 엄마에게 지금은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기도 하고 기본적인 것에 울고 웃고 하십니다. 그리고 늘 평안하고 행복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 오늘이 즐거우시면 행복하신 것이죠. 지금은 표현을 못하시는 엄마가 계신 그 세계를 알고 싶습니다. 정말 원하시는 걸 해드리고 싶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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