톳·뿔소라 수출 문제 해결위해 美 유학 포기
한예종 출신 연극학도 "할 수 있는 걸 하자"
해녀 할머니 설득·창업 자금 마련에 2년 소요
2호점 낸 2년차 창업 새내기 "목표는 5호점"

김하원 대표(31)는 국내 최초 극장식 레스토랑 ‘해녀의 부엌’을 2년째 운영하고 있다. 실제 해녀가 먹는 식사와 해녀의 삶을 담은 공연을 제공하는 ‘해녀의 부엌’은 인기가 대단하다. 코로나 상황에도 예약을 잡기 힘들 정도다.

지난 10월 말 찾은 제주에서 김 대표는 2호점 오픈을 앞두고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연극과 식사를 선보인 후, 실제 고객들에게 예약을 오픈할 예정이었다. 마감이 되지 않은 가게 안을 운동복 차림으로 누비는 김 대표는 꿈많은 대학생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김하원 대표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다. 16살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선발하는 예술영재로 뽑혀 17살에 서울로 상경했다. 이후 10년간 연극을 전공했다. 김 대표는 아동 예술 치료에 흥미를 느껴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유학을 떠나기 전 방학을 맞아 들린 제주에서 우연히 어머니가 ‘톳’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걸 알게됐다.

미역류인 톳은 90%가 제주도에서 자라는데, 대부분 일본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원가가 하락하며 해녀들은 더 이상 톳을 채취하지 않게 됐고, 생산량이 줄어들자 바다도 변했다.

“해산물은 계속 채취를 해줘야 자라거든요. 근데 해녀들이 채취를 하지 않으니까, 바다도 더 이상 자연산 톳이 자라지 않는 환경으로 바뀌는 거죠. 그 얘기를 듣고 굉장히 큰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이후 아버지가 뿔소라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김 대표는 유학길을 포기했다. 함께 연극을 하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같이 재미있는 프로젝트 해보자고 했어요. 그게 시작이었죠.”

김 대표는 사업적인 성공을 바라고 시작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마을, 고객, 그리고 팀원들에 대한 책임감이 커지다 결국 사업이 됐다.

“해녀들은 어릴 때부터 물질을 하다보니 대부분 교육을 못 받아요. 평생 주목받지 못하고 살아가거든요. ‘해녀의 부엌’에서 관객들이 박수쳐주고, 고생했다고 감사하다고 하면 그때마다 해녀 할머니가 우세요. 자기가 죽을 때가 되서 이런 호강을 한다고요. 힘들어도 해녀 할머니를 보면 다시 힘이 나요.”

인터뷰 중인 김하원 해녀의 부엌 대표./사진=이민경PD

- 해녀의 부엌은 어떤 가게인가요?

"해녀의 부엌은 제주도 해녀분들과 청년 예술가들이 모여서, 제주산 해산물을 국내 소비시장에 알리려고 노력 중인 가게입니다."

- 제주출신 연극 전공생이라는 이력이 독특합니다. 연극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중학생 때 한예종 예술영재로 선발됐어요. 17살에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서울에서 나왔어요. 어릴 때부터 예술 교육을 많이 받기도 했고, 연기를 하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 지를 배웠어요.

원래 연기를 활용한 아동 예술 치료 쪽으로 공부를 더 하고 싶었요. 한예종에 들어가서 그런 공부들을 하고 있었고, 그러다 지금 사업을 하게 됐죠."

- 갑작스럽게 제주도로 돌아와서 식당을 운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미국 유학을 앞두고 방학 때 집에 왔는데 저희 어머니가 ‘톳’ 문제 때문에 굉장히 골머리를 앓고 계시더라고요. 톳은 거의 일본 판매에 의존하는데 가격이 떨어져서 인건비도 안 나오니까 해녀들이 톳 채취를 하지 않으려고 해요. 해산물도 채취를 해줘야 거기서 자라는데 방치되니까 생산량이 줄어들어요. 그러니까 바다가 더 이상 자연산 톳이 날 수 없는 환경으로 변해가고 있는 거에요.

저는 제주도에서 태어나서 해녀 집안에서 자랐어요. 가족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어요. 해산물을 어떻게 하면 매력적으로 알릴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주도를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 극장식 레스토랑 형태를 만들어서 창업을 하게 됐죠."

- 창업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문화예술 청년 창업에 도움을 주는 자금을 받아서 ‘해녀의 부엌’ 모델에 대한 베타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자료를 바탕으로 제주도 해녀문화유산과에 해산물을 알리고 싶으니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래서 처음에 자금을 지원해 주셨어요."

- 해녀 분들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려웠죠. 이분들도 해산물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다만, 오랜 세월 익숙한 방식으로 해오던 것에 변화를 줘야하는 걸 부담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분들과 놀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미술로도 놀고, 연기로도 놀았어요. 일탈할 수 있는 시간을 예술로 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 다음에 공간을 하루만 빌려달라고 해서 마을 분들을 초대했어요. 해녀분을 주인공으로 연극을 했어요. 마을분들이 좋아하셨죠. 그리고 한 번도 박수받으면서 살아오지 못했던 본인의 삶에 박수를 받는 경험을 해보니 그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하셨어요.

본점은 사실 제 고향이에요. 다른 사람보다 좋은 조건에서 시작할 수 있었죠. 우선은 마을에 청년들이 오니까 좋은 일이 생기는 구나를 경험 시켜드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친분 형성하고 지원받는 과정에 2년 정도 기간이 걸렸습니다."

인터뷰 중인 김하원 해녀의 부엌 대표./사진=이민경PD
인터뷰 중인 김하원 해녀의 부엌 대표./사진=이민경PD

- 일하면서 보람을 느낀 순간은?

"사실 저한테 해녀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에요. 당연한 존재거든요. 저희 할머니, 고모, 큰엄마, 이모 다 해녀니까. 일을 하면서 해녀에 대해 알아가고 어떤 문화를 만들고 삶을 살아왔는지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저희 고모가 60대신데, 아직도 할머니가 초등학교 보내주지 않은 걸 얘기하면서 우시거든요. 해녀분들은 굉장히 어린 나이 때부터 물질을 시작하기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어디 가서 해녀라는 소리 듣고 싶어하지 않아 하시고, 초라한 인생이라고만 생각하세요. 그런데 이분들이 무대에 오르면서 박수받고 응원받으니까 ‘그래도 나 잘 살아왔네’라고 말하더라고요.

90세 해녀 할머니랑 같이 공연하는데, 관객분들이 박수 보내고 응원해주시면 그때마다 우세요. ‘죽을 때가 되서 호사를 누린다’고 하시는 거 보면서 보람되고, 작은 힘이나마 보상해주는 시간을 제공해드린 것에 대한 뿌듯함이 있어요."

- 팀원 분위기가 좋습니다. 현지 분과 서울 분이 섞이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저는 도민이지만, 서울에서도 한 10년간 생활했어요. 그래서 중간지점에서 연결고리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 팀원 자체가 사람을 좋아하고, 여기 있는 순수한 영혼과 교감을 좋아하는 분들이 들어와요. 저는 팀원을 뽑을 때 사람에 대한 고민을 얼마나 깊이 있게 하는 사람인 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저희 회사가 3명으로 시작해서, 지금 청년은 10명 정도 있어요. 저희 회사에 11계명이 있는데, 거기에 ‘2090이 우리 회사의 최대 경쟁력’이라는 얘기가 있어요. 청년만 모이거나 해녀만 모였으면 빨리 해체됐을 거에요. 근데 저희 안에 다툼이 생겨도 할머니 보면 다 풀리거든요."

- 2호점은 원래 계획했던 건가요?

"제주도에 5호점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지역별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 메뉴는 어떻게 선정하시나요?

"모든 메뉴는 실제 해녀들의 음식이에요. 제주도 음식의 특징은 해산물이든, 농산물이든 거의 날 것 그대로예요. 거기서 조금 양념한 정도. 그러니까 제주도는 오랫동안 숙성시킨 음식이 없어요. 거의 5일 안에 먹어야 돼요. 그때그때 제철에 맞는 해산물을 활용해서 음식을 해주시는데, 메인은 뿔소라에요. 저희가 뿔소라 시장을 만들어내는 것에 가장 집중하고 있어요. 그래서 뿔소라 같은 경우는 회로도 나오고, 구이로도 나오고, 국으로도 나오고, 양념장으로도 나와요."

- 제주하면 성게나 전복이 떠오르는데, 뿔소라에 포커스를 맞춘 이유가 있나요?

"해녀분들이 1년에 9개월에서 10개월 정도 채취하는데, 그 중에 8개월 이상 채취하는 게 뿔소라에요. 주 소득원이 되는 해산물이라서 굉장히 중요해요. 가격 가치가 하락하면 소득에 많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희가 뿔소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인터뷰 중인 김하원 해녀의 부엌 대표./사진=이민경PD

- 서울이 그립지는 않나요?

"지금도 서울 많이 왔다갔다해요. 서울과 제주 각각의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저를 만나는 분들이 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더라고요. 인상이 편안해 보인대요. 저는 약간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요. 서울 살 때는 5분 단위로 계획하면서 살았어요. 제가 대학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 8명을 봤거든요. 아침에 아이들 보고, 학교 생활하고, 끝나면 또 아이들 보면서 일요일까지 살았어요. 한 번 지하철을 놓치면 모든 게 틀어지는 일정이 되니까. 날도 많이 서고 예민했던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바쁘게 살지만 여기서는 많이 웃어요."

- 컴플레인 고객은 없었나요?

"신기한 게 처음에 예민하게 입장하시거나 컴플레인 거셨던 분도 나갈 때는 저희 손 잡고 이런 거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세요. 저희가 뿔소라 유통을 한 적이 있는데, 가는 과정에서 하나가 상한 거에요. 전화가 와서 제가 깜짝 놀라서 교환해드리겠다고 했는데, 저희 때문에 해녀분들 물질 한 번 더 나가야되는 거 아니냐, 죄송하다고 오히려 말씀하시더라고요."

- 예술성과 수익성 중에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나요?

"회사잖아요. 수익성이 제일 중요하죠. 근데 건강한 방법으로, 그리고 사회에 좋은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으로 수익을 내고 싶어요."

-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나요?

"해녀의 부엌에 네 번 오신 분이 있어요. 베타 테스트 때 오시고, 가오픈 첫날에 오시고, 두 번은 손님을 모시고 오셨어요. 그래서 그 분 같은 경우는 잊혀지지 않고 피드백을 깊게 듣는 편이에요.

그분도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모델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시는 분이셨고, 그런 고민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해녀의 부엌이 놀라웠다고 하시더라고요."

- 삶의 만족도를 숫자로 따지면 얼마나 되나요?

"그래도 늘 90은 됐던 것 같아요. 어려운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잖아요. 그럴 때도 재밌어요. 그리고 항상 삶을 살 때 내가 다음날 바라봤을 때 어제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해요. 계산하고, 내가 이만큼 할 수 있는데, 줄이고 그러면 불행한 것 같아요. 내가 만나는 사람, 하는 일,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나를 만나는 게 저에게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모습이고, 그렇게 살고 있어요."

- 나에게 ‘해녀’란?

"저에게 ‘해녀’는 엄마에요. 저한테는 특별하지 않아요. 근데 특별해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존재인 것 같아요."

- 그러면 ‘해녀의 부엌’이란?

"저희 연극에서 90세 할머니 내레이션으로 나와요. 우리한테 바다가 뭐냐고 우리 부엌이지. 거기 들어가야 자식들 밥상에 음식 하나 더 올려놓을 수 있으니까. 해녀들에게 바다는 살기도 하고 또 죽기도 하는 곳이거든요. 근데 들어가지 않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는 곳이에요. 저한테 해녀의 부엌은 바다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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