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장매성, ‘소녀회’ 활동가

여성경제신문·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광복 75주년 기념 ‘오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9일부터 21일까지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에서 열린다.

장매성_이진석作 /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장매성_이진석作 /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장매성 張梅性(1911~1993)

운동계열 : 학생운동 | 훈격(서훈년도) : 애족장(1990)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 새겨진 글귀다. 광주학생운동은 학생이 주체가 된 독립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며,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민족독립만세운동으로 발전하게 됐다.

광주 지역 학생운동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장재성의 동생이던 장매성 선생은 광주여고보 재학 중 1928년 11월에 장경례, 박옥련, 남협협, 고순례, 이금자 등과 함께 광주사범학교 뒷산에 모여 조국의 독립과 여성해방을 목적한 항일학생결사 ‘소녀회(少女會)’를 조직했다.

이들은 학교 내외에서 동지를 포섭하고, 매월 1회 월례연구회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박계남, 박채희, 박현숙, 김금연, 김귀선 등을 동지로 포섭했으며, 선생의 집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월례회를 개최했다.

‘성진회(醒進會)’의 항일정신을 계승해 광주학생의 항일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1929년에 결성된 ‘독서회중앙본부’와도 연락을 갖고 활동했다. 후에 독서회원의 친목단결 및 재정활동 지원을 위해 학생소비조합을 조직할 때 각 학교 독서회 및 학생들로부터 자본금을 출자하게 했는데, 이때 광주여고보에서는 소녀회가 주동이 되어 자본금 30원을 출자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소녀회 동지들과 함께 가두시위 도중 다친 부상 학생 치료, 식수 공급, 돌멩이 운반 등 남학생들의 가두시위를 도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1930년 1월 15일에 체포되었으며 그해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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