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윤용자, 한국혁명여성동맹 활동
여성경제신문·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광복 75주년 기념 ‘오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중 열릴 예정이다.

윤용자 尹龍慈 (1980~1964)
운동계열 : 중국 방면 | 훈격(서훈년도) : 애족장(2017)
“나는 이미 군인의 길로 들어서서 나라와 겨레를 위망에서 튼튼히 지키려고 결심하였은즉,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몸이오. 그러니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는 나와 뜻을 같이하겠다면 고생을 마다않고 늙으신 어머니를 나 대신 잘 모셔주며 만약에 혈육이 생긴다면 잘 교육시켜주는 일이오. 만일 이것이 나의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한다면 나를 따라 시집오지 않아도 좋소. 당신의 뜻을 분명히 해 주시오.”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지청전 장군,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그가 윤용자 선생의 남편이다. 혼인 후 첫날밤 지 장군은 윤 선생에게 위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시 18세였던 선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윤 선생은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또 2남 2녀의(지달수, 지선학, 지복영, 지정계) 어머니로서 모두를 독립운동가로 키워낸 훌륭한 여성독립운동가였다.
남편 지청천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4년 아이들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윤 선생은 만주에서도 1~2년마다 거주지를 옮겨야 했다. 1939년 중국 기강현에서 한국국민당 당원, 1940년 중국 중경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