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유관순, 열여덟 소녀 독립운동가
여성경제신문·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광복 75주년 기념 ‘오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중 열릴 예정이다.

유관순 柳寬順 (1902~1920)
운동계열 : 3·1운동 | 훈격(서훈년도) : 독립장(1962), 대한민국장(2019)
유관순 열사는 1902년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재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공주에 왔던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서울 이화학당으로 편입, 1918년 3월 보통과를 졸업하고 4월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학했다.
1919년 국내의 3·1운동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이화학당 내 비밀결사인 ‘이문희’ 선배들을 통해 이 계획을 알고 있던 열사 또한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서명학, 김분옥 김희자, 국현숙 등 4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했다.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학교 뒷담을 넘어 시위 운동에 동참했으며, 3월 5일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 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 운동에도 참여했다.
조선총독부가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자, 열사는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고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해 본격적인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했다.
교회, 학교 등을 찾아다녔으며,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과 김구응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의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여들었다.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시위 중의 만세 소리로 진동했다. 이때 열사는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하였다.
시위 현장에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들은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으며,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다쳤다. 열사를 포함해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등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천안헌병대로 압송됐다.
유관순 열사는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후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3년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그녀는 옥중에서도 어윤희, 박인덕 등과 계속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8세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