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부춘화, 해녀 독립운동가
여성경제신문·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광복 75주년 기념 ‘오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중 열릴 예정이다.

부춘화 夫春花 (1908~1995)
운동계열 : 국내 항일 | 훈격(서훈년도) : 건국포장(2003)
부춘화 지사는 제주도 구좌읍 하도리에서 태어났다. 15살 때부터 물질을 배웠고, 밤에는 사립보통학교 야간학부에서 공부했다. 부 지사의 나이 21살 때 해녀조합 산하 조직인 구좌면 해녀대표로 선임되어 해녀 회장이 되었다.
당시 제주에는 관제조합인 해녀어업조합이 10여 년 넘게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수탈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0년과 1931년 성산포와 하도리에서 조합이 경매가격을 하향 책정하는 횡포가 발생하자,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장날을 택해 부 지사의 주도 하에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본격 시위에 돌입했다.
일본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려고 했으나, 해녀들의 강한 반발로 실패했다. 이후 1월 12일에 2차 시위가 벌어지자, 일본은 목포 경찰대까지 동원해 부덕량, 김옥련 등을 포함한 시위 연루자 100여 명을 잡아들였다.
1월 24일, 부 지사는 체포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해녀들과 함께 주재소를 습격해 건물을 파괴했다. 이때 많은 해녀들이 부상당하고 체포됐다. 해녀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자신이 홀로 주동했다고 자수해 목포 유치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른 그녀는 이후 일본의 감시와 미행에 시달리다가, 1933년 오사카로 피신했다.
광복 후 제주도로 귀환한 부 지사는 고향 세화리에서 부인회장을 하며 해녀들의 권익 옹호에 힘썼으며, 이후 부산·서울 등지에서 살다가 1995년 3월 향년 88세로 서울에서 사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