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마디의 아프리카 그림일기]
2017년 6월 25일, 나미비아 국경
별이 빼곡하게 들어찬 밤하늘

2017년 6월 25일 오후 4:24
말이 입 밖으로 나와서
어떤 말들은 흩어지고
어떤 말들은 쌓여서 탑이 되고
흩어진 말들을 되짚어본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말들
(내게로 와서 흩어진 말들도)
—매일매일 은하수, 흩어진 말들
2017년 6월 25일 / 나미비아 국경 / 구름 대신 별이 빼곡하게 들어찬 밤하늘
10시간을 달려 나미비아 국경에 왔다. 한국에서는 차를 타고 하루에 10시간을 내달려 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 가봤던 가장 먼 거리가 서울 영등포에서 거제도 몽돌해변. 그때 예닐곱 시간이 걸렸는데 지금은 장장 10시간을 내달려서 다른 나라 국경에 왔다.
시간이 늦어 숙소 잡기가 애매해 국경 근처 마을 어귀에 차를 대고 노숙했다. 깜깜하게 불 꺼진 마을 뒤로 밤새 은하수가 화려하게 쏟아지던 밤. 내가 살던 서울에서 정말 정말 멀리 떨어져 온 게 실감이 난다.

국경
아프리카 여행에서 살면서 처음 느껴본 것 중 하나가 바로 국경이다. 한국의 여권 파워가 세서 대부분의 나라가 무비자라고 하는데도 아프리카에서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30~50달러에 비자를 끊었다.
게다가 도착 비자가 아닌 사전 비자를 발행하는 나라는 떠나기 전 주변국에 있을 때 미리 대사관에 방문해서 서류에 내 사진을 붙여서 내고 돈 내고 허가를 기다려서 비자를 받아야만 들고 출국할 수 있다. 나미비아는 내가 간 사전 비자 국가 중 첫 번째 나라. 훌쩍 갈 수 없는 까다로운 나라다.
그렇다면 국경은 왜 넘는가? 꼭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넘는다. 국경에서 여행자는 작아진다. 내 마음을 작아지게 하는 국경의 분위기는 이렇다.
국경 1 : 면접
1) 나를 그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허락을 요청한다. 이곳에 왜 왔는지, 뭘 할 건지 물어볼 것을 대비해 사전에 자체 검열을 하고 할 말을 정해야 한다.
2) 돈도 서류도 국경 넘는 시간도 전적으로 저쪽 요구와 일정에 맞춰서 준비하고 기다린다.
3) 입국 심사 통로는 좁다. 한 사람씩 검문당한다.
4) 허름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이미 꾀죄죄하지만) 조금이라도 멀끔하게 머리와 옷매무새를 매만진다. (나중에) 남아공에서 밤 버스를 타고 짐바브웨 벳브릿지 국경을 넘을 때는 같이 줄 선 사람들이 대부분 허름한 행색과 지친 기색의 남자들이라서 나도 혹시 외국 노동자를 하려는 중국인처럼 보일까 봐 더 명랑하게 여행자임을 어필했었다. (동양인은 무조건 차이나이다. 아시안이 아니라 차이나라고 부른다)
5) 왜 이곳에 왔는지, 뭘 할 건지 영어로 물어보는데, 준비한 것 이외의 내용을 물어볼 때 못 알아들으면 말문이 턱 막힌다. 여기서 대답 못 하면 못 들어가니까 이 사람이 진지하게 계속 추궁할지 대충 넘어가 줄지 몰라서 긴장된다.
버스표 끊어서 한 사람씩 올라타는 거랑은 달라. 이건 꼭 회사 면접이다. 첫눈에 나를 판단할 수 있도록 첫인상에 엄청나게 공을 들여야 한다. 예전에 가만히 쳐다만 봐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아주 잘생긴 오빠랑 소개팅했을 때 내 마음이 이랬다.
국경 2 : 지나온 곳과 이별
국경을 넘고 나면 이제 저편으로는 다시 갈 수 없다. 모든 허가가 끝난 뒤에는 잠깐이라도 다시 다녀오려면 그 전 나라 비자를 다시 사야 하고, 여기에 다시 돌아올 때 비자를 또 사야 한다. 내 이전 여정이 쭉 이어지는 게 아니라 단절되었다가 새로 시작된다.
여행 이전의 기억과 약속들 역시 이제는 유효기간이 만료된 것 같아. 나는 한국을 떠났고, 사람들에게 언제 돌아간다는 약속을 못 한 채로 아프리카에 왔다는 것이 두 발로 국경을 넘으니까 실감이 났다.
나는 아주 꼬맹이일 때부터 엄마한테 “엄마 내가 다음에 그거 사줄게, 내가 다음에 그거 해줄게.” 하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예전에 내가 딸이었을 때, 친구였을 때, 여자 친구였을 때 했던 약속들이 그 관계가 종료되고 나서는 지키지 못할 말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결혼 적령기의 청년으로 살 때, 회사원으로 살 때, 학생으로 살 때 내가 미래의 나와 했던 약속들 역시 이젠 유효기간이 끝난 것같이 느껴졌다.
같은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더라면 그런 크고 작은 약속과 다짐을 내 계획으로 삼아 하나하나 이뤄가는 게 곧 삶이었을 텐데. 앞으로는 이전과 정말 다른 삶을 살 것 같아. 그래서 이전에 했던 말들이 이젠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여성경제신문 윤마디 일러스트레이터 madimadi-e@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