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마디의 아프리카 그림일기]
장기 여행이란? 
우당탕 부수고 바꾸고 따지러 가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매달리는 날들

2017년 6월 24일 / 케이프타운 공항 / 석양이 내 속처럼 타들어 가는 저녁

이 길을 몇 번이나 가는지 모르겠다. 처음 케이프타운 공항에 내려서 여행을 시작하고는 다신 안 올 줄 알았으나 남아공 항공에서 내 캐리어를 안 보내주는 통에 거의 매일 공항에 출석 체크를 한다. “오늘 저녁 홍콩에서 오는 비행기에 보낼게요.” 다음 날 전화하면 “어? 안 왔네?” 이 대화를 닷새째 반복했다.

오늘은 나미비아 비자가 나와서 바로 떠나려다가 공항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가보기로 했다. 오늘도 수하물 창구에서 한참 하소연하다가 마지막에는 레코라는 직원에게 악수하며 10달러를 쥐여줬다. 보스가 그쪽에 다이렉트로 이메일을 보내줄 거라고. 이 이메일이 10달러 값어치일까? 레코의 보스는 내 캐리어를 보내줄 수 있는 사람일까?

하지만 컴플레인은 무조건 높은 클래스 창구에 해야 하는 법. ‘매니저 불러!’의 뜻을 알았다. 우연히 VIP 전용 창구를 알게 되어 찾아가니까, 홍콩으로 바로 전화해서 캐리어가 거기에 있다는 확인과 함께 “내일 꼭 보낸다”는 메시지를 그 자리에서 인쇄해 줬다. 10달러짜리 이메일은 대체 뭐람. 골치 아파 정말···. 결국 오늘도 쪽지 한 장 덜렁 들고 소득 없이 공항을 나섰다.

나 때문에 시작부터 발목 잡힌 친구들에게 정말 미안했다. 닷새 동안 하루 75달러 청구할 수 있으니 내가 그만큼 공금으로 묻겠다고 하자, 병민이가 그 돈보다 하루이틀 미뤄지는 게 우리 기회비용이 더 크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말밖에 없다. 병민이는 나중에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했지만, 당연히 그럴 만하다.

‘내일은 뭐가 됐든 나미비아로 출발하자. 더는 케이프타운에서 지체할 수 없어. 앞으로 들르는 도시에 있는 공항으로 받든지 하자. 제발 이 공항은, 이제 끝!!’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접고 공항을 나섰다. 다운타운으로 돌아와 마트 직원에게 동네 맛집을 추천받고 있을 때, 병민이가 가방을 공항에 두고 온 걸 알았다! 여권, 돈, DSLR 카메라··· 늘 들고 다니는 전부가 들어 있는 가방. 평소엔 전대에 여권과 비상금을 넣어 다니더니 오늘 하필이면 배낭에 전부 넣었다고···.

다시 차를 몰아 공항으로 향했다. 가방이 있을 리가 없지. 악명높은 남아공에서. 길 가던 사람도 쓰러뜨려 가방을 뺏어간다는 그 남아공에서. 카페 안에서 전화하는 휴대폰도 순식간에 뺏어 달아난다는 그곳에서. ‘어서 가져가세요~’ 하고 놓고 온 가방이 제자리에 있을 리가···. 성욱이가 운전하고 병민이는 조수석에 힘없이 앉아 먼저 조기 귀국하겠다고, 나중에 한국에서 보자고 했다.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런데 공항에 가보니, 병민이가 앉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세상에 마상에. 식당가 사람 북적이는 곳에서!!! 신이 나서 넷이서 공항 로비에서 강강술래를 돌았다. 깡충깡충 뛰면서. 일주일 내내 지루하고 피 말리는 싸움을 하다가 덜컥 한순간 모든 걸 내려놓고 한국으로 갈 뻔했다가 다시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다.

큰 일이 무사히 끝나자 처음 일은 별거 아닌 게 된다. ‘그래, 홍콩에 있다는데 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되는 걸 보면 지금 매달려도 소용없나 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금방 마음이 접혔다. 다신 안 볼 줄 알았던 이 뷰를 또 보면서 다운타운으로 간다.

해가 진다. 붉은빛 젖어오는 하늘이 평화롭다···. 오늘 하루는 길에서 다 버렸는데도, 내 심정이 어떻든 석양은 늘 제시간에 온다. 석양을 따라 오늘 저녁은 또 뭐 해 먹지, 어디서 자지. 숙소를 검색하는데 문득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케이프타운 도로 위에서 /그림=일러스트 윤마디 madimadi-e@naver.com
케이프타운 도로 위에서 /그림=일러스트 윤마디 madimadi-e@naver.com

장기 여행이란? 
우당탕 부수고, 바꾸고, 따지러 가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매달리는 날들. 

회사, 가족, 내가 적을 걸어두었던 모든 것을 헐레벌레 덮어두고. 할 일은 끝없이 내게 매달려오는데도 뿌리쳐 떨어내고 새 짐만 들고 비행기를 탔다, 도망가듯이. 그런데 결국 짐이 남았다. 간신히 날 따라오다가 남겨졌다. 그것도 홍콩에.

인천–홍콩–요하네스버그–케이프타운. 장장 세 번을 갈아타는 여정. 홍콩에서 캐세이퍼시픽을 타고 요하네스버그에 와서 남아공 항공 SAA로 갈아타야 하는데, 내 캐리어가 오지 않았다. 남은 환승 시간은 30분.

일단 수하물 미도착 신고 번호를 받고, 무거운 가방을 나눠서 들쳐메고 큰 공항을 가로질러 10분 전에 탑승했다. 그렇게 간신히 도착한 케이프타운. 그때부터 항공사와의 씨름이 시작됐다. 홍콩에서 요하네스버그 편은 하루에 한 번 뿐인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안 왔네?”

캠핑 장비를 챙겨온 캐리어라서 그 캐리어가 있어야 나미비아를 필두로 캠핑 여행을 시작하는 건데. 차는 있는데 캠핑계획을 짤 수가 없으니 당장 내일 어디로 떠날지, 무엇을 해 먹을지 모르는 채로 오지 않는 짐을 마음의 짐처럼 안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 자유여행, 장기 여행, 배낭여행이라는 건 바로 이런 일들을 여행자 스스로 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이 모든 게 한국 여행, 패키지여행, 짧은 외국 여행에서는 하지 않았을 일이다.

짧은 국내 여행이야 떠나는 전날 밤 짐 싸면 되고, 모든 예약도 핸드폰에서 터치 몇 번으로 되고, 며칠씩 다녀오는 외국 여행도 일정표에 따라 가볍게 캐리어 하나 들고 가면 되니까. 장기 여행은 현지에서 모든 걸 내가 직접 준비해야 하고, 예상치 못한 일을 수습하는 것도 내 몫이다. 

처음 가보는 곳을 두려워할 때 누군가 말했지. 거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라고···. 여행이라는 건 새로운 곳에서도 사람 사는 게 이어진다는 말인 것 같다.

삼시세끼와 오늘 묵을 곳을 매번 찾고 결정해야 한다는 게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하던 시대와 다를 바 없는 데다, 어디론가 이동하는 일, 이동하기 위해 미리 여기저기 들러 서류를 제출해서 허가받는 일이 그야말로 ‘일’처럼 느껴진다.

한국에서 내가 하던 일 아닌가. 일정 점검, 담당자 닦달, 손해 배상 청구, 항의하고 조건 따지기. 케이프타운에 머문 며칠 만에 초조함과 기다림, 비굴하게 조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래, 한국에서 하던 일 여기서도 하듯이, 이번 여행 중에서도 이렇게 사건 사고는 계속 일어날 거고 나는 그 사고를 처리하는 데 며칠씩 또 쓰게 될 것이다. 이 따지고 처리하는 맛에 자유여행 하는 거겠지. 

우리는 내일 북쪽으로 올라간다. 케이프타운이라는 대도시에서 긴장 속에 며칠을 지냈다. 캠핑용품이 잔뜩 든 캐리어는 아직 없지만 그래도 떠난다. 사륜구동차를 몰고. 국경을 지나 사막과 별빛으로 들어갈 생각을 한다.

우리는 내일 북쪽으로 올라간다. 국경을 지나 사막과 별빛으로 들어간다. /그림=일러스트 윤마디 madimadi-e@naver.com
우리는 내일 북쪽으로 올라간다. 국경을 지나 사막과 별빛으로 들어간다. /그림=일러스트 윤마디 madimadi-e@naver.com
홍콩-요하네스버그-케이프타운 이동 경로
홍콩-요하네스버그-케이프타운 이동 경로

여성경제신문 윤마디 일러스트레이터 madimad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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