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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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현대인은 매일 수많은 콘텐츠를 스쳐 지나간다. 그중 어떤 장면은 뜻밖에 발길을 붙잡고, 짧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다. ‘편한숏’은 그 순간에 주목한다. 이야기 속에서 장면이 품은 감정과 맥락을 읽어낸다. 영화, 드라마, OTT 등 서사가 있는 영상 콘텐츠를 바탕으로 화면 속 짧은 순간을 통해 지금 이 시대와 우리가 마주한 질문들을 함께 들여다본다. [편집자주] |

출근길 지하철역 붐비는 플랫폼에 서서 발 디딜 틈을 찾는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 낯선 이와 어깨를 부딪히고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도로 위에서는 경적 소리가 귓가를 찌르고 옆 차선 운전자의 한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현대인은 이렇게 감정적, 물리적으로 끊임없이 부딪히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은 드물다. 업무와 관계에서 요구되는 책임, 사회적 시선과 평가, 경쟁 속에서 밀려나는 불안이 복합적으로 억제 장치가 된다. 화를 드러내는 순간 관계나 기회가 손상될 수 있다는 계산이 앞서고 결국 사람들은 ‘화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화낼 타이밍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간다.
표출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때론 엉뚱한 상황에서 터져버린다.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은 바로 그 터짐의 순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전에 축적돼 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추적한다.
대니(스티븐 연 역)는 삶을 방치한 적이 없지만 삶은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는 부모를 위해 땅을 사고 동생과 함께 사업을 이어가려 한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은 누군가를 위한 헌신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는 고군분투처럼 보인다. 대니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가족 공동체의 모습은 붙잡으려 할수록 멀어지고 예기치 않은 불행은 기다렸다는 듯 일을 망친다.
에이미(앨리 웡 역) 역시 분노를 품고 있다. 그는 사회적 기준에서 이미 성공한 사람이다. 자수성가해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최소한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그 모든 ‘안정’은 애초부터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는 구조 위에 쌓여 있었다. 에이미는 언제나 침착해야 한다. 고객 앞에서, 투자자 앞에서, 남편과 아이 앞에서.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고 고른 선택을 하고, 좋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 그것이 자신을 지탱해온 방식이었다.
그 방식은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감정을 외면한 대가는 점점 그의 내부를 갉아먹는다. 총을 들고 혼자 욕망을 분출하거나 파괴적인 관계에 끌리는 이유는 단지 충동 때문이 아니다. 자신 안에 오래 방치된 감정들이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출구를 찾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상담도 받고 감정을 표현해보려 애쓰지만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다.
어떤 분노에는 깊은 슬픔이 깔려 있다. 대니가 외딴 곳에서 감당하기 힘든 양의 햄버거를 계속해서 먹는 장면에서는 슬픔이 느껴진다. 씹고 삼키는 행위가 마치 감졍을 억눌러 삼키는 의식처럼 느껴진다. (스티븐 연은 어찌 그리도 애처로이 연기를 잘 하는지) 밖으로 향하지 못한 분노는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해 쌓인다.

이 지점에서 보자면 에이미와 대니의 분노는 서로를 향해 있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해 되돌아온 감정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실제로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공격하고 파괴하려 든다. 하지만 그 감정의 기원은 타인에게 있지 않다. 타인을 향한 분노라는 형식을 빌렸을 뿐 그 안에는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실망, 자기혐오, 불안감이 얽혀 있다. 이들의 분노는 파괴의 형태를 띠지만 표적을 겨누는 대신 자기 안에서 맴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무너졌지만 우연히 같은 깊이의 고립 상태에 도달한 순간에서야 비로소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한다.
‘성난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타인을 향하는 듯한 분노가 실은 개인이 감당해온 세계와의 불화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대니와 에이미의 충돌은 사소한 시비로 시작되지만 그 배후에는 각자 감당해온 책임과 역할, 통제할 수 없었던 환경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요구받는다. 분노는 미숙함으로, 침착함은 성숙함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적절히 흘러가지 못한 것들은 결국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진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개인의 의지만으로 수습되지 않는다.
이러한 분노는 해부해야한다. 분노가 향하는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촉발되는 지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결국 자기 삶에서 감당해온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마주해야한다는 것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 언제나 분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의 분노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성난 사람들 (BEEF)
감독: 이성진
주연: 스티븐 연 (연상엽, Steven Yeun), 앨리 웡 (Ali Wong)
※ 이 글은 기자 개인의 해석과 감상을 담은 칼럼입니다.
여성경제신문 박소연 기자 syeon0213@seoul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