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주의 Good Buy]
소설의 첫 문장처럼
달릴 기회의 씨앗이 되어준
내 인생 첫 '흰색 러닝화'

기회는 대개 ‘오는 것’이지만 때로는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의욕은 있는데 기회가 없어 기로에 서 있다면, 기회를 ‘만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기회를 만드는 방법 중 하나로 ‘일단 돈을 쓰는 것’이 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다. 운전을 하기 위해 중고차를 산 경험, 옷방을 정리하기 위해 정리함부터 산 경험, 운동을 하기 위해 헬스장 회원권부터 끊은 경험, 여행을 가기 위해 숙소부터 예약한 경험 등 말이다. 어쩌면 나는 돈으로 결심을 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작년 가을. 러닝을 시작해 볼까 하는 마음에 러닝화를 샀다. 경복궁역 근처에 ‘온유어마크(onyourmark)’라는 러닝 편집숍에 방문 예약을 넣었다. 이 매장은 이런저런 신발들을 진열해 판매하는 ‘일반적인’ 신발가게가 아닌, 고객의 족형을 분석하여 ‘맞춤 신발’을 큐레이션하고 판매하는 곳이다.

얼핏 신어보고 “오, 예쁘다!” “괜찮은데요? 잘 맞는 것 같아요~” 정도로 신발을 사는 데 익숙했던 내가 이토록 체계적인 데이터로 맞춤 러닝화를 사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치 정말로 러너(runner)가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푸마(Puma) 브랜드의 ‘매그맥스 나이트로(MagMax Nitro)' 러닝화 / 권혁주

매장 직원은 나의 측정 데이터를 토대로, 푸마(Puma) 브랜드의 ‘매그맥스 나이트로(MagMax Nitro)' 러닝화를 추천했다. 가격은 20만원대. 구름처럼 폭신한 쿠션감을 갖춘, 러닝 입문자에게 친절한 신발이었다.

무엇보다 ‘조용한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고 깨끗한 흰색. '패션'처럼 튀지도, '기능'처럼 투박하지도 않은 느낌은 뽐내기보다 감추는 쪽에 가까웠다. 항공모함처럼 다소 육중해 보이는 외관에 무겁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들어보니 무척 가벼웠다. 믿음이 갔다. 한마디로 ‘묵묵하게 일 잘하게 생긴 운동화’였다.

당초 내가 원했던 핫한 러닝화 브랜드(온, 호카, 나이키 등)나 예쁜 색채감에 날렵한 핏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러닝화 신고 패션쇼 나가는 것도 아니고) 기능성과 미학 사이 절묘한 균형에 못 이기는 척 타협했다. 초보 러너의 순진한 의욕과 귀여운 결심을 지지해 줄 든든한 스폰서를 얻은 기분이었다. 내 돈 들여 산 첫 번째 러닝화 '푸마 매그맥스 나이트로'는 ‘깔끔한 결심’ 그 자체였다.

러닝화를 신은 모습 /권혁주
러닝화를 신은 모습 /권혁주

새 신발은 다짐이다. 얼룩 한 점 없는 깨끗한 상태의 흰색 러닝화. 그 청결함 속엔 이 흰색이 바래지고 더러워지는 만큼 짙어질 ‘무언가를 향한 의욕’이 깃들어 있다. 유행이든 루틴이든, 삶의 리듬을 새로 잡겠다는 의지가 발끝에 머문다. 신발장을 열었을 때 눈앞에 러닝화가 보인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을 건네는 기분이다. ‘나를 신고 달려보지 않을래?' 건강하고 달콤한 제안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러닝은 단순한 운동이지만, 러닝화는 하나의 서사다. 러닝화를 신고 뛰는 모습을 그릴 때,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삶에 건강하고 부지런하며 내면에 단단한 사람. 그 상상을 뒷받침하는 시작이 나에겐 이 흰색 러닝화였다.

(왼쪽) 10km 마라톤 대회. (오른쪽) 아차산 트레일 러닝 /권혁주
(왼쪽) 10km 마라톤 대회. (오른쪽) 아차산 트레일 러닝 /권혁주

푸마 매그맥스 나이트로. 이 러닝화와 함께 써 내려간 장면들을 떠올려본다. 경복궁 담벼락 가을과 겨울과 봄과 여름, 10km 마라톤 대회의 열기, 한강 변의 물 내음, 아차산 능선 눈앞에 펼쳐졌던 하늘, 한숨 고르는 횡단보도 머리 위로 드리운 빌딩 숲 등. 달릴 기회가 필요했던 내게 이 러닝화는 마치 소설의 첫 문장처럼 기회의 씨앗이 되어주었다.

그러므로 러닝화를 살지 말지 고민하던 1년 전쯤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빨리 사서 뛰라고. 그리고 만약 푸마 매그맥스 나이트로 러닝화를 살 생각이라면, 그 신발은 꽤나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여성경제신문 권혁주 쇼호스트 kwonhj10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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