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권위자 황일순 서울대 명예교수
국내 원자력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카터-박정희 공동 재처리 약속 재조명
폐기물 관리기간 1만년서 300년 단축
6·3 대선이 ‘카운트다운’에 돌입했다. 각 후보들은 에너지 믹스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쳤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와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원자력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적극 활용하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원전의 위험성과 사용후핵연료 문제로 현재 가동 중인 원전까지만 사용하자는 입장을 나타냈다.
여성경제신문은 한국 원자력계 최고 권위자인 황일순 서울대 명예교수(前 UNIST 석좌교수)의 작심 인터뷰를 녹여내어 차기 정부의 원자력 정책에 제언한다. 핵무기화, 사용후핵연료, 안전 사고, 우라늄 고갈 등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지속가능한 에너지로서의 원자력 발전의 역할을 풀어내는 코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제21대 대선 후보 주자들이 원자력 발전에 대한 공약을 각자 제시하며 차별성을 부각하지만 정작 ‘사용후핵연료’ 문제에 대해선 로드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의 오랜 숙원인 사용후핵연료 처리와 관련해 대선 후보들의 위기 의식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재명 후보는 지난달 18일 경제 분야 TV 토론에서 원전의 위험성을 놓고 다른 후보와 설전을 벌이다 “(원전은) 사용후핵연료 문제도 있지 않느냐”고 언급은 했지만 공약집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넣지 않았다. 원전 확대를 공약으로 내건 김문수 후보 역시 새 원전이 가동되면 핵 폐기물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도 사용후핵연료 처리 방안은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원전 정책 자체를 공약집에 담지 않았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관리에관한특별법이 지난 2월 27일 국회를 통과했지만 부지 선정 기준과 지원책 등 세부 사항이 마련되지 않아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이하 방폐물) 영구처분장 부지가 결정되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깊다. 부안 사태를 겪었듯이 영구처분장 유치를 둘러싸고 결국 지역민들의 반발, 님비현상을 극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쌓이고 있는 고준위 방폐물 처리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원자력 강국인 미국, 프랑스, 일본도 고준위 방폐물 처분장 유치가 진전되지 않고 있다. 핀란드가 세계 최초 고준위 방폐물 저장시설 ‘온칼로’를 만들었지만 전 세계에 이제 하나 완성된 셈이다.

게다가 온칼로는 고준위 방폐물 특성상 10만년간 격리를 해야하며 저장용량이 6500t에 불과하다. 현재 국내에만 약 1만8600톤의 고준위 폐기물이 고스란히 원전 내 임시 보관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지속적으로 나올 용량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 가운데 황일순 교수는 파이로프로세싱을 활용한 ‘국제 공동 재처리센터’ 건립 추진을 통해 사용후핵연료 문제를 풀어가자고 제안했다. 언론과 미디어 노출을 통해 ‘재처리=핵무기 개발’을 떠올리기 쉽지만 파이로프로세싱을 통해 재처리를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는 이야기다.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기술은 ‘재래식 재처리 기술’과 ‘파이로프로세싱 기술’로 나뉜다. 재래식 재처리 기술은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 추출과 연계되지만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은 핵확산 금지 대상인 고순도 플루토늄의 추출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핵비확산성 건식 재처리 기술이다.
파이로프로세싱은 환경친화적인 방법을 통해 사용후핵연료를 획기적으로 감량할 수 있다. 황 교수는 “원자력 발전을 하면 나오는 고준위 방폐물을 정제해서 관리 기간을 1만년 이상에서 300년으로 줄이는 중준위 방폐물로 바꿀 수 있다”이라며 “300년은 풍력 발전기 블레이드를 땅에 묻으면 분해되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황 교수에 따르면 파이로프로세싱을 통해 정제한 중준위 방폐물은 방향성 시추(directional drilling) 기술을 통해 지표 아래 1~3km 깊이로 파내려가 신중히 선정된 지질층에 수평으로 매설할 수 있다. 이를 ‘심층 격리(Deep Isolation)’라고 부른다.
중준위 폐기물 격리에 이상적인 지질 환경은 회수 가능한 천연자원이 없는 지층이다. 점토 함량이 높아 보다 연성(유연)이고 균열이 생겨도 스스로 치유되는(균열이 지속되지 않는) 특성을 지닌 셰일층이 선호된다. 이러한 지층은 자원 채굴에는 부적합하기 때문에 적절한 격리 부지로 간주된다.

단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이 정직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각국에선 금지하고 원자력 동맹을 통해 국제 공동으로만 재처리 할 수 있게 하자는 게 황 교수의 주장이다. 각국에서 원자력 발전을 한 뒤 사용후핵연료를 ‘국제 공동 재처리센터’로 이송해 농축·재처리 한 뒤 다시 각국으로 돌려보내는 방식이다.
황일순 교수는 “이렇게 하면 특정국이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재처리를 할 수 없게 만들면서도 고준위 방폐물을 중준위 처리하고 평화적으로 재생 연료를 확보할 길이 열리는 것”이라며 “원전의 ‘요람에서 무덤까지(Cradle-To-Grave)’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설명했다.
국가 공동 재처리 센터를 활용한 사용후핵연료 처리는 최근 처음 나온 제안이 아니다. 이미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동아시아 다국적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센터’를 건립하여 한국을 돕겠다고 제안한 바 있다.
황 교수는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기술 도입을 시도하고 의도를 감춘 채 여러 핵기술을 도입하려 노력했다”며 “1976년 당선된 카터 대통령은 박 대통령의 핵개발 의지를 만류하기 위해 동아시아 다국적 재처리 시설 건설을 추진해 한국을 돕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여성경제신문이 입수한 당시 미 국무부가 주한 미국대사관에 발신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만약 한국이 재처리 도입을 포기한다면 한미간에 핵 분야에서 협력할 것이며 동아시아 국가들에 다국적 재처리 시설을 권장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을 도울 것’이라고 명시됐다.

황 교수는 “카터 대통령의 제안을 한국 원자력계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몇 년 전 한용섭 전 국방대 교수가 조지워싱턴대학 서고에서 그 외교 문서를 찾아냈다”며 “이를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2015년 한미원자력협정 때 파이로프로세싱과 다국적 재처리 시설을 허용해달라고 미국 측에 강력히 제안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어 “한미원자력협정 유효기간은 20년으로 2035년에 재협상 시한이 도래하는데 남은 10년간 치밀하게 구상해 이를 꼭 제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시아 다국적 공동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센터 부지를 어디에 하면 좋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황 교수는 “괌 또는 괌 주위 인공섬을 하나 만들어 해양플랜트로 추진해도 괜찮을 것”이라며 “다만 중국, 러시아의 반발은 감수해야 하며 미국 영국과 단단한 원자력 동맹을 결성해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⑤편에서 계속 됩니다]
<황일순 박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 학사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 석사
△한국과학기술원 기계공학 석사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핵재료공학 박사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재료공학과 연구 교수
△기초전력연구원 원전성능관리연구센터 설립
△미국 에너지성 유카산 고준위처분장기술개발 국제전문위원
△원자력정상회의(SHAPE-2010) 공동조직위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원자핵공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에너지시스템공학과 명예교수
△한국핵정책학회 부설 핵안보연구소 소장
△울산과학기술원 석좌교수
여성경제신문 유준상 기자 lostem_bass@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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