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는 자본·법제 주도, 日은 공정 기술력
철강·반도체·배터리·방산 전방위 침투
韓 이념·전략 없는 '변방의 들러리' 우려

일본이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기술 동맹국 중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미국 내 생산 회귀’ 기조는 동맹국들에게도 명확한 역할 재배치를 요구했으며 일본은 이에 발맞춰 자국 기술을 미국 생산 시스템에 전략적으로 이식해왔다. 내수 시장의 한계를 직시한 일본은 신 고부가가치 기술을 전방에 배치하며 미국의 생산 수요를 조용히 장악하고 있다.
27일 산업계에 따르면, 일본은 철강·반도체·배터리·조선·방산 등 분야에서 미국 법제 기반 전략에 발맞춰 주요 공급망 파트너로 참여 중이다. 단순한 기술 수출을 넘어, 미국이 주도하는 보조금 체계와 규제 인프라 안에서 자국 기술력을 접목시키는 방식으로 전략적 입지를 확장하고 있다.
먼저 철강 부문에서 일본제철은 미국 US스틸 인수를 추진 중이며, 이는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른 녹색철강 투자 확대와 맞물려 북미 공급망 내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특히 최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인수를 승인하는 입장을 밝히면서 일본 측은 불확실성을 줄이고 본격적인 진출 채비에 나선 모양새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일본의 차세대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Rapidus)가 미국 CHIPS법의 전략적 수혜 대상이 되어 뉴욕주 알바니 지역에 첨단 반도체 생산 거점을 구축 중이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의 기술 자립을 위한 공급망 확보 전략과 일본의 기술력 제공이 맞물린 지정학적 공조 사례로 평가된다.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에 대해 연구개발 예산과 세제 지원, 인력 양성 등을 포함한 대규모 정책적 후원을 병행하고 있다.
배터리 분야에서는 프라임플래닛 에너지앤솔루션즈(Prime Planet Energy & Solutions)가 핵심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 회사는 도요타와 파나소닉이 공동 출자한 합작법인으로 북미 전기차 시장 공략을 위해 전략적 공급망 재편에 나섰다. 특히 미국의 IRA가 북미산 배터리 부품과 핵심광물 비율을 엄격히 요구하면서 프라임플래닛은 해당 요건을 충족할 수 있도록 생산 기반과 소재 조달 경로를 미국·멕시코 등 FTA 체결국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다.
일본 내 주요 배터리 소재 제조사들과도 연계해 북미 조립→일본 원소재→미국 완성차 공장으로 이어지는 삼각 공급망을 구축 중이며 이 과정에서 미국 에너지부(DOE)와의 정책 협조도 병행되고 있다. 프라임플래닛은 도요타그룹 전체의 북미 전동화 전략을 뒷받침하는 핵심 인프라로 기능하고 있다.
조선·방산 부문에서는 미쓰이E&S가 미국의 국방수권법(NDAA)과 연계해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미쓰이E&S는 해양플랜트 설계 및 군용 함정 제작에 특화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 해군의 해양 감시 및 해상 작전능력 강화를 위한 공동사업에 참여 중이다.
미국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위한 해양전력 확충을 핵심 안보 아젠다로 삼고 있다. 일본 기업의 정밀조선·시스템 통합 역량이 전략 자산으로 부각되는 이유다. 미쓰이E&S는 신형 초계함, 수중작전 보조장비 등 고부가가치 방산 기술 분야로 협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일본 방위성 역시 이와 연계해 기술이전 및 공공조달 협정을 체결하며 동맹형 산업 육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본은 내수 시장의 정체와 인구 감소로 인해 자국만의 산업 성장 경로에 한계를 경험했다. 이에 따라 국내 생산 유인을 줄이는 대신,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동맹의 생산 체계에 자국 기술을 결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기술을 수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핵심 공정과 고급 제조역량을 동맹 내부에 투입함으로써 국제 공급망에서의 역할을 바꿔가고 있다는 평가다. 더는 경쟁자가 아니라 미국의 경제안보 전략 설계 파트너로 위치를 바꾸고 있다.
한국 역시 첨단 산업에서 경쟁력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나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조금 요건 충족, 기술 이전 제한 대응, 생산시설 이전 등 개별 기업 차원의 접근은 활발하지만 국가 단위에서의 기술 배치와 외교 전략은 미비하다는 평가다.
대표적 사례가 삼성전자의 미국 텍사스 테일러시 반도체 공장 건설이다. 2021년 공표된 이 투자 프로젝트는 한미 기술 협력의 상징으로 떠올랐지만 미국 정부가 보조금 지급을 조건으로 민감 정보를 요구하고, 수익 공유 조항 등을 포함시키면서 장기간 지연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윤석열 정부는 명확한 외교적 대응을 하지 못한 채 공급망 내 협상력 약화를 노출시켰다.
미·일이 기술을 '동맹 수단'으로 해석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여전히 기술을 산업 부문 내부 문제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강하다. 정치권 첨단산업과 안보가 결합된 기술 블록화 흐름 앞에서도 이념적 좌표 자체가 부재하다는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진영 간 갈등조차 실제로는 명확한 비전이나 철학 없는 정쟁에 그치며 장기적 산업 전략을 수립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여성경제신문에 "공급망 재편은 기술 성능의 우열이 아니라 제도와 자본, 법체계 안에서 ‘누가 어디에 배치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게임이 됐다"며 "일본은 일찌감치 기술을 동맹 내 질서 재편의 열쇠로 재정의했고 미국 중심 질서 안에서 자리를 선점하고 있다"며 "한국도 기술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에 대한 전략 전환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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