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한국형 은퇴자마을 조성 추진
단양 실패 등 AIP 외면한 설계 지적
UBRC 등 지역 연계형 대안도 주목

정부가 인구감소지역 중심으로 '은퇴자마을' 법제화를 추진 중인 가운데 대다수 노인이 ‘살던 곳에서의 노후(AIP)’를 원하는 현실과 충돌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16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초고령사회 진입에 따른 지역 소멸 해법으로 '은퇴자마을'이 국가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다. 지난 1월 엄태영 국민의힘 의원이 ‘은퇴자마을 조성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하는 등 국회 논의도 병행되고 있다. 해당 법안은 인구감소지역 중심의 은퇴자마을을 국가 차원에서 제도화하되 국토교통부와 보건복지부가 기본계획을 공동 수립하고 조성은 지자체와 민간이 맡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계는 ‘AIP(Aging in Place, 살던 곳에서 노후를 보내길 원하는 수요)’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실제로 지난 2020년 충북 단양에서는 은퇴자마을 시범 사업이 논의됐지만 고령자들의 지역 이주를 전제로 한 주거 설계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지적 속에 무산된 바 있다. 단양 보건소 인근 부지를 활용한 해당 사업은 의료 인프라 부족과 수요 미확보로 인해 착공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 사업을 추진했던 이미홍 LH토지주택연구원 실장은 지난 11일 열린 ‘은퇴자가 온다! 초고령사회 대비 시니어 주거 혁신전략 토론회’에서 “그때도 수요가 핵심 문제였다. 70~80%의 고령자는 자기 집에서 생을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는 AIP 수요를 고려하지 못했다”며 “이번에도 같은 구조라면 또 실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실장은 “지방으로 이주를 전제한 은퇴자마을은 수요 자체가 협소하다. 최근엔 인건비·자재비 상승까지 겹쳐 사업성이 더 악화하고 있다”며 “정부나 소비자가 이 갭을 메워줄 수 없다면 민간은 비수도권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했다.
실버타운 전문 유튜브 채널 '공빠TV'를 운영하는 문성택 대표는 여성경제신문과 통화에서 “평생 다른 삶을 살아온 노인들을 연고도 없는 지방에 모아 전원주택 단지를 조성한다는 발상은 애초에 실현 가능성이 낮다”며 “이런 방식은 AIP를 실현하지 못하는 채 탁상공론으로 세금만 낭비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추진하는 은퇴자마을은 노인 주거의 핵심인 식사 제공이 빠진 채 ‘살고 싶은 사람 알아서 살라’는 식의 구조인데 실제로 그런 곳에 정착할 사람은 거의 없다”며 “은퇴자마을이 필요한 계층은 따로 있는데 정작 그들이 원하는 AIP는 설계에 빠져 있다”고 꼬집었다.
이번 법안은 고령자 삶의 질 제고와 지역 활성화를 동시에 목표로 삼고 있지만 운영 주체, 재정 분담, 입지 기준 등에 대한 구체적 방안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다. 박광재 한국주거학회장은 토론회에서 “중산층을 포함한 실제 수요층을 반영한 입지 전략이 필요하다”며 “은퇴자 도시보다는 도심형 복합모델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복합 개발과 지역 자원 연계가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최근 국회에서 언급된 UBRC(대학연계형 은퇴자 커뮤니티)와 같은 대안 모델은 AIP 수요를 존중하면서도 지역 활력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마강래 중앙대학교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여성경제신문에 “UBRC는 바람직한 모델”이라며 “다만 소프트웨어 설계가 핵심이다. 단순히 대학 내 부지에 주거단지를 조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입주자에게 대학 내 소규모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학과와 연계된 교류 프로그램이 함께 설계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실버타운 입주자가 강사나 행정 보조 인력으로 활동하거나 사회복지·상담학과와 연계된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적·복지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사례가 많다”며 “국내에선 이 같은 개발 경험이 거의 없어 초기 성공 모델을 만드는 것이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문성택 대표는 여성경제신문에 “UBRC가 실현되기 위해선 방학 기간 중 대학의 빈 공간을 활용한 단기 프로그램부터 점진적으로 시작하는 것이 타당하다”라며 “지방대 10곳 이상이 협의체를 구성해 시니어들이 원하는 여러 전공 분야를 나누고 이들이 10곳의 대학을 다니며 학습과 지역 경험을 병행하는 구조가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이어 “이러한 모델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면 대학도 살리고 시니어에게도 배움과 활동의 기회를 줄 수 있다”며 “지역 내 시니어 일자리 연계, 인적 인프라 구축 등과도 맞물리면서 훨씬 지속가능한 구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성경제신문 김정수 기자 essence@seoul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