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어쩌다 한 달, 이탈리아 (6)
바로크 예술의 정수, 베나리아 궁전과 만드리아 성
그리스도의 수의와 오컬트의 검은 마법
젤라토로 구원받고 1유로 때문에 싸우고

텐트 입구로 레이저처럼 가느다란 빛이 들어오며 해가 떴다. 아직 따뜻함이라고는 없는 공기가 내 얼굴을 스쳤다.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와 커피를 내렸다. 뜨거운 커피 한 잔과 갓 구운 크루아상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대부분 유럽 캠핑장에서는 다음날 먹을 빵을 전날 주문해 둘 수 있다. 동네 빵 가게에 주문을 대리해 주는 경우엔 빵 차가 배달을 왔고 드물지만 캠핑장에서 운영하는 베이커리가 있기도 했다. 유럽 여행 중에 빵을 많이 먹었지만 캠핑장에서 아침에 먹었던 빵들이 제일 맛있었다. 

캠핑장에 열리는 오전 카페 빵 차, 새벽 배송 크로아상으로 아침을 먹었다. /사진=박재희
캠핑장에 열리는 오전 카페 빵 차, 새벽 배송 크로아상으로 아침을 먹었다. /사진=박재희

“토리노는 동계 유니버스지.” “토리노 하면 국제 도서전만 생각나는데.” "토리노는 예수님의 수의로 유명하지 않아?"

모두가 자신에게 강력한 도시의 상징을 말했지만, 오늘은 내가 정한 여정을 따르기로 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베나리아 궁전(La Venaria Reale)과 카스텔로 델라 만드리아(Castello della Mandria)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토리노의 보석 같은 명소들이다.

사보이 왕가의 위엄과 우아함이 곳곳에 묻어나는 이곳은 한때 유럽 최고의 사냥터와 별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물론 사냥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오래전 예술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신비로운 회랑을 직접 걸어보고 싶었고 또한 이탈리아 통일 왕국의 초대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그의 비밀 연인 로사 바르톨리나의 밀회 장소이기도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토리노(Torino) 사보이 왕국의 수도이자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수도이기도 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토리노(Torino) 사보이 왕국의 수도이자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수도이기도 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토리노는 통일 이탈리아의 첫 번째 수도이기도 하지만 신비주의와 오컬트의 중심지로도 유명하다. 이 도시는 선과 악의 마법이 뒤섞이는 곳이라고 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흰색은 선한 것을 검은색은 악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시신을 감쌌다고 알려진 예수의 수의(Shroud of Turin)가 도시를 신성한 에너지로 보호한다는 흰 마법을 대표한다. 검은 마법은 포강(Po River) 근처 광장에서 벌어진다는 어두운 주술 의식을 통해 힘을 얻는다고 했다. 도대체 어떤 에너지가 흐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우리는 세례자 요한 대성당(Cattedrale di San Giovanni Battista)과 광장도 방문해 보기로 했다. 흰 마법과 검은 마법이 교차하는 이곳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지 기대 반 의심 반으로.

베나리아 레알레(La Venaria Reale)는 바로크 건축의 정수였다. 사보이 왕가가 17세기에 지은 이 궁전은 단순히 여름 별장이 아니라 거대한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특히 갤러리아 그란데(Galleria Grande)는 정말 마법과 같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회랑에 햇살이 스며들면 벽과 천장의 정교한 장식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나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섰다. 내 안의 흰 마법이 깨어나 몸이 둥실 떠오르려나 했지만 현실은 그냥 두 발로 대리석 바닥 위를 걷는 것뿐이었다.

베나리아 궁전 /사진=박재희
베나리아 궁전 /사진=박재희
베나리아 궁전의 미술박물관은 귀한 컬렉션의 전시로도 유명하다. /사진=박재희
베나리아 궁전의 미술박물관은 귀한 컬렉션의 전시로도 유명하다. /사진=박재희

지도에서는 궁전에서 카스텔로 델라 만드리아(Castello della Mandria)가 멀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6킬로미터라는 거리를 걸어가기로 한 나의 선택은 낭만적이라기보다는 그저 경솔한 것이었다. 백조가 우아하게 움직이는 호수와 매력적인 오솔길을 돌아 걷는 것은 잠시 즐거웠지만 이내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순간의 판단 착오를 꾸짖으며 걸었다.

왕과 연인이 울창한 숲속에서 비밀스럽게 만났을 장면을 상상하다가 풀을 뜯는 사슴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상상하는 금지된 로맨스를 사슴의 조상의 조상들은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만드리아성과 베나리아 궁전은 사뭇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베나리아가 흰 마법으로 가득한 화려한 궁전이라면, 만드리아는 조용하고 은밀한 검은 마법의 공간이라고 할까? 울창한 숲과 광활한 초원이 빚어내는 은밀한 마법을 만끽한 뒤 토리노 시내로 돌아와 두 광장을 탐험하기로 했다. 

카스텔로 광장(Piazza Castello)과 산 카를로 광장(Piazza San Carlo)도 역시 각각 흰 마법과 검은 마법의 중심지로 여겨진다. 카스텔로 광장은 웅장한 건축물과 그리스도의 수의를 보관하는 대성당이 신성한 분위기를 뿜어내며 선한 에너지를 상징하는 반면, 산 카를로 광장은 검은 마법의 이야기가 깃든 공간이다. 지하 세계로 이어지는 비밀의 문이 있으며, 한때 마법 의식이 열렸다는 그 광장.

우리는 두 광장을 거닐며 도시의 서로 다른 분위기를 느껴보려 애썼다. 카스텔로 광장을 거닐다가 노점에서 젤라토를 하나씩 샀다. 햇빛 아래 땀을 흘리며 걷는 동안 젤라토가 녹아 손에 흰 크림을 잔뜩 묻히고 말았다. “이거야말로 흰 마법의 상징이 아니겠어?” 왜 아닐까 이래도 저래도 아이스크림은 인간을 구원하는 법이다.

토리노의 세례자 요한 대성당: 예수의 수의를 보관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토리노의 세례자 요한 대성당: 예수의 수의를 보관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다음은 검은 마법의 영역으로 여겨진다는 산 카를로 광장이다. 이곳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낮인데도 묘하게 서늘한 느낌이다. 광장 중앙의 동상이 주위를 압도하며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도 같다.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동상 아래 검은 마법의 문이 숨겨져 있고, 이를 통해 지하 세계로 이어진다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검은 마법의 중심지라 그런가? 야릇하게 긴장되는 느낌인걸.” 후니는 무언가 느낀다는데 난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저 배가 고파지고 있으니 조금 짜증스러웠을 뿐.

젤라토를 맛볼 때 느꼈던 마법 같은 기분, 마치 흰 마법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던 즐거움은 차를 타고 제노바로 향하는 동안 증발했다. 땡볕 아래에서 오래 걸어서 피곤했던 데다 걷는 것보다 차를 타고 움직이는 시간이 길어지니 허리가 아팠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중간에 들린 슈퍼마켓에서 강력한 검은 마법이 찾아왔으므로.

우리는 제노바로 가기 전 저녁거리 쇼핑을 했다. 미 선배와 후니는 고기 야채 안줏거리를 사고 나는 유제품 코너에서 쇼핑 품목을 찾아 계산대에서 만났다. 줄을 섰는데 미 선배는 내가 집어 온 요거트, 치즈, 바나나를 카트에서 모두 빼냈다. 

···(어리둥절) 왜 그러는 거야?

“할인코너에서 샀어야지. 이거 가져다 놓고 오른쪽 구석으로 가봐.” 

“할인해 봐야 얼마나 싸겠어? 그냥 계산하자. 언제 다시 가서 찾아?” 

“아니지. 똑같은 걸 왜 비싸게 사니? 1유로 차이라도 아낄 건 아껴야지.” 

두 사람은 방금 배고픈 사람과 논쟁하지 말라는 금기를 어긴 것이었다. 미 선배와 후니는 피곤하고 졸리고 배고픈 종족이 얼마나 포악해질 수 있는지 보려는 걸까? 순간 무언가에(아마도 검은 마법) 휩싸이듯 화가 치밀었다. 

“늦었잖아. 우리 시간 없어. 하루 종일 겨우 젤라토 하나 먹었는데 제노바 가서 캠핑장에 텐트 치고 밥은 언제 먹어요? 기껏해야 1, 2유로 쌀 텐데 그거 아끼자고 나더러 이걸 다 바꿔오란 거야? 줄을 다시 서라는 거냐구우우우?” 

목소리를 높였다. 알뜰 정신이야 이해하지만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제일 비싼 건 시간이라고 시간! 하지만 두 사람의 묵묵한 거부. 2 : 1 다수결 파워에 밀려 결국 나는 할인 중이라는 요구르트와 치즈를 위해 ‘광활한’ 슈퍼마켓을 가로질러 신선 코너로 갔다. 총액 1.25유로 저렴한 물품을 위해서!

계산대로 돌아왔을 때 아니나 다를까 줄은 그사이 길어져 있었다. 으아아아악!! 매번 조금 더 싼 것을 찾는 두 사람과 이쯤에서 헤어져 버릴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던 순간이었다.

캠핑장에 도착하고 텐트를 치는 동안 말을 건넬 기분이 아니었다. 눈치 빠른 후니는 테이블을 펴더니 저녁 전에 와인 한 잔을 건넸다. 불편한 표정이던 미 선배도 다가왔다. 

“재희 덕분에 우리 1700원 아꼈네. 재희야 넌 한 잔 더 마셔~”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는 미 선배의 너스레를 들으며 와인을 삼키는데 피식 웃음이 난다. 역시 세상에서 벌어지는 문제 대부분은 아이스크림과 와인이 해결한다는 말은 진리다. 와인을 마시며 함께 고기를 굽고 떨어지는 해를 구경했다. 그렇게 평화롭게 하루가 마무리될 줄 알았다. 

설거지까지 모두 끝낸 후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급기야 텐트가 흔들리더니 오른쪽 코너 한쪽이 털썩 무너진다. “왓 더···.” 나가보니 뒤늦게 캠핑장에 도착한 러시아의 젊은 청년들이다. 이미 반쯤 취한 상태에서 휘청휘청 텐트 사이를 오가다 사고를 친 것이다.

우리나라 캠핑장에서는 둘러앉아 화기애애한 밤 시간을 보내는 것이 흔한 광경이지만 유럽에서는 다르다. 개인 공간과 시간을 존중해 9시 이후에는 이동을 삼가고 미세한 소음도 주의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한다. 그런데 11시가 넘은 시간에 도착해서 술과 웃음소리라니.

무너진 폴을 세우는데 부아가 치밀었다. 조용히 하라고 계속 소란을 피우면 사무실에 항의하겠다고 그러면 너희는 캠핑장을 떠나야 할 거야! 라고 하려다 꿀꺽 삼켰다. “조용조용히 부탁해. 모두 잠들었거든. 너희도 빨리 굿나잇 하렴.”

캠핑장에서 마주한 저녁 전 화해의 테이블, 역시 와인은 세상 문제의 대부분을 해결한다고 믿는다. /사진=박재희
캠핑장에서 마주한 저녁 전 화해의 테이블, 역시 와인은 세상 문제의 대부분을 해결한다고 믿는다. /사진=박재희

여행은 날씨와 같아서 때로는 화창하고 때로는 우중충하다. 하지만 여행은 마법과도 같아서 결국 그사이 특별한 이야기를 찾아낸다. 나의 여행은 이렇게 밝고 그렇게 어두울 것이다. 우연히 행운을 만나는가 하면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젤라토 한입에 마법 같은 순간을 맞기도 하고 1유로 때문에 다투는 경우도 있겠지만 와인 한 잔으로 하루를 완성할 수도 있다. 그러면 되는 거다. 파우치를 뒤져 귀마개를 찾아냈다. 오늘도 하늘은 별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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