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해미백일장 최복심 님 입상작

요양원의 한 어르신과 포옹하는 필자 /최복심
요양원의 한 어르신과 포옹하는 필자 /최복심

처음에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준비할 때는 그냥 단순했다.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들도 존재했지만, 전업주부로 살던 나에게는 사회 준비의 출발점으로 도전해 보았다. 우연히 요양병원 시설에 취업하게 됐다. 두려웠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묘한 사명감까지 생겼다.

자신의 용변 처리는커녕 의사 전달조차도 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정해진 시간에 배변 관리와 면도를 해주며 나도 모르게 “기분 좋으세요? 개운하세요?”하는 눈 맞춤으로 말 걸어보면서 “눈 한번 깜박여 보세요” 하면 그분은 놀라울 정도로 눈을 깜박이며 입가에는 연한 미소가 번졌다. 놀라움이었다.

내가 이전에 가졌던 요양 시설의 환자들은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식물상태의 분들이라는 생각을 가졌는데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존중받아야 하고 돌봄을 하는 나 자신이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생각의 관점이 다른 탓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자부심 또한 때때로 무너지고 혼란스러운 경험을 갖기도 했다.

시간에 쫓겨 빠르게 배설 케어와 자동차 세차하듯 목욕을 진행하고 빠듯한 지침 아래에 신체적 피로, 감정적 부담으로 둘째 아이의 입시 준비 핑계를 대면서 퇴사했다. 퇴사 이후에도 무언가 배우고 싶었고 평소에 배우고 싶었던 세밀화, 야생화 자수, 공예 등도 배우러 다녔다. 평소에 남들 앞에 나서서 말하기보다는 글을 쓰고 읽는 것을 흥미로워하는 나는 문화 해설사 강좌가 있어 1년 정도 공부해 보았는데 역사에 스토리를 재구성하고, 숨어있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나름대로 실전에도 참여하여 동하기도 했지만, 또 활기찬 삶을 위해서 운동도 하러 다녔다. 관심 있는 대체의학도 공부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은 왠지 모르게 공허하고 허탈했다. 나에게는 순간순간 느껴지는 감정에 희열과 감동과 보람은 없었다. 전업주부로만 살던 나에게 사회와 소통하고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고민해 보다 “당신은 참 재능이 많은 사람이야. 어려움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지. 동물에게든 사람에게든, 사람을 돌보고 교감하는 능력이 있는 당신에게는 맞는 일인지도 몰라” 남편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좀 더 밀착해서 다가가는 돌봄은 어떨까? 시스템에 따르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상황에 맞춰 필요한 부분을 자의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 뭘까 하는 생각 중에 재가 방문 요양을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부분과 가려운 부분을 내 자의적인 선택으로 돌봄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행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가 돌봄 서비스가 중증 환자 대상이 아닌 일반 요양이 크기 때문에 힘없고 가여우신 분을 도와주는 수준이다. 내가 추구하는 요양 보호사 역할은 적극적인 돌봄 서비스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필요한 것이 있는데도 생각과 달리 다른 소리가 나는,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대소변에 어려움을 겪는 어르신들 말이다.

바람 한 점 없는 일요일 오후 지칠 줄 모르는 매미 소리가 들리고 거실에는 나지막하게 들리는 에어컨이 가동되는 소리 밖으로 나가면 한증막처럼 숨을 헐떡이게 하는 뜨거운 햇살과 더운 공기···. 7월 24일부터 요양원 근무를 다시 시작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여느 요양 시설이 그렇듯 치매 환자, 골격계 질환자들이 생활하고 있는 요양 시설을 집처럼 생활하시게끔 운영하는 생활 시설이다 보니 청소, 식사 관리, 목욕 등 모든 게 요양 보호사를 비롯한 의료, 물리치료사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젊었을 때는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드시고, 자신의 의지대로 용변을 처리하고 자신의 발로 움직이셨지만 각기 다른 이유로 이곳에 오셔서 생활하시는 공간. 손가락 하나도 남에게 의지해야 하고 자신의 대소변조차도 처리할 수 없고 침대에 뉘어드리면 항상 머릿속은 복잡했다. 계속해서 엄마를 찾으며 홀 안을 배회하기도 하고 지금 몇 시인지, 무슨 계절인지 혼란스럽고 막막하지만, 연거푸 질문하신다.

내 손으로 키웠던 손녀 모습을 떠올리며 요양 보호사 선생님을 손녀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추위와 더위를 구분 못 하고 온몸으로 전해지는 통증과 가려움을 경험한다. 실낱같은 건강할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억을 붙잡아 보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소리는 허공에 메아리 같은 소리가 나올 뿐이다.

나도 젊고, 예쁘고, 건강할 때가 있었지.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그때가 있었지.” “그때가 있었지.” 젊음이 항상 내 곁에 머물러 있을 것 같았지만 자식들 키우고, 시부모 부양하고, 돈 벌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다 보니 그때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곳으로 구름처럼 밀려왔다.

이러한 치매 어르신들을 돌보면서 처음에는 측은하고 애잔한 마음이 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 자신 또한 늙어감에 어떠한 모습으로 선택하고 마주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더더욱 어르신들에게 애정이 생겨났다. 어르신들도 예상치 못한,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을 테니까. 통증과 가려움, 외로움, 두려움,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원망과 허탈함을 이해하려면 이제 어르신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행복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감정교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요양 보호사는 단순히 어르신들에게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해 주는 차원이 아닌 지지하고, 격려하고 하는 긍정적인 정서적 지원이 필요해 보였다. 어르신들이 앓고 있는 질환들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자연스레 흘러가는 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동료의식이 생겼다.

생로병사를 겪을 수밖에 없는 생명체에게 주어진 숙명이기도 하다. 그러면 그 최전선에 서 있는 요양 보호사들은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육체적, 감성적 지원까지 해야 하는 요양 보호사들은 최저 시급이라는 허울 속에서 노동을 강요당하고, 건강이 망가지고, 사명감이라는 미명아래 희생을 강요당해야 하는가? 집안에 엄마가 행복하고 건강해야만 집안에 먹거리가 달라지고, 다정한 언어가 깃들 수밖에 없다.

바로 요양 보호사들이 행복하고 사명감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는 남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침을 닦는 일은 못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진정으로 누구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 아픔을 이해하고 서러움을 느껴 눈물지어 본 적이 있느냐고. 사회적인 인식도 변해야 한다. 고령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가는 시대에 어리석다는 뜻의 한자어인 치매 병명을 인지병 혹은 인지 저하증으로 개정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한다. 병명이 뭐가 대수인가? 노화의 한 증상으로 기억력이 퇴화하는 것을.

우리는 서로 노화라는 큰 문제를 대함에 있어 변화해 나가는 신체 변화에 순응해야 한다. 또한 요양 시설 속에 몸담은 요양 보호사와 어르신들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작은 눈 맞춤, 작은 두드림, 치매에 대한 선입견, 요양 보호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들이 바뀌어야 한다. 시설의 주축은 어르신들과 어르신들을 밤낮없이 돌보고 있는 요양 보호사들에게 있다. 자신의 자존감과 존중이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그 축의 중심이 그들에게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오늘도 손재주가 좋으신 어르신이 작은 구슬을 꿰어서 실 팔찌를 선물해 주셨다. 주황색 구슬이지만 빨간색이 어울릴 것 같다고 하시면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분들에게 내가 돌봄을 드리는 주체가 아니라 내가 그저 한없이 고마운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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