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영의 부국강병]
2000년간 제국 수도의 향기가 밴 도시
한국인을 형제로 대접하는 특별한 도시
6·25 때 세 번째로 큰 규모 파병한 혈맹

노벨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은 이스탄불의 작가이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Istanbul, Memories and the City)>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의 흥망성쇠와 그 무상함에 대한 진한 감정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이스탄불은 2000년 역사의 영화를 뒤로하고 쇠퇴해 갔지만, 그곳에서 대대로 명문가로 살아온 그의 가족에 대한 추억과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그의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다. 그는 대가족이 함께 살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아쉬움과 비애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이스탄불은 비잔티움, 동로마, 오스만 등 2000년 제국의 수도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운항하는 유람선들 /픽사베이 
이스탄불은 비잔티움, 동로마, 오스만 등 2000년 제국의 수도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운항하는 유람선들 /픽사베이 

“갈라타 다리를 지나가는 차들, 여전히 허물어지지 않는 목조가옥으로 둘러싸인 변두리 마을들, 축구 경기를 보러 가는 사람들, 석탄 실은 나룻배를 끌고 가는 예인선이 보스포루스(Bosphorus)를 지나가는 것을 바라본다.

아버지가 내게 해주었던 인생에 대한 현명한 충고들, 예를 들면 인간은 자신의 본능, 고민과 강박관념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 삶이 아주 빠르게 지나가므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인생의 심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조언을 떠올린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위치한 이스탄불.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제국 비잔틴, 로마와 오스만의 수도로 20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다.

이스탄불의 거리에는 과거의 영화와 찬란했던 시절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어 생생한 역사의 한 장면을 지금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1500만명이 살아가는 현대 도시의 면모도 간직하면서 동서양의 문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렇게 신비한 향기를 풍기는 도시가 또 있을까 싶다.

이 도시를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667년에 비잔티움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다가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콘스탄티누스 1세가 330년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로마를 본떠 도시를 개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로 명명한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약 1100년간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패하여 멸망하자 도시의 색깔과 정체성도 모두 바뀌게 된다. 이때 이 견고한 도시의 정복에 오스만 제국의 정예부대 예니첼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메메드 2세의 용맹한 군사들과 더불어 헝가리 출신 우르반이 만든 거대한 대포가 견고한 콘스탄티노플의 성곽을 무너뜨린 공성전에 큰 도움이 됐다고 전해진다.

이후 오스만제국은 지중해 연안의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까지 장악하고 북으로 헝가리까지 정복했다. 콘스탄티노플은 강력한 오스만 제국의 수도 역할을 1922년까지 한다.

최근 이스탄불은 유럽에서 가장 살기 좋은 최고의 도시로 선정되었다. 비교적 싼 물가와 역사적인 유물, 풍요하고 다양한 문화를 간직한 저런 도시가 드물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의 번화가 탁심 광장의 인파와 트램 /픽사베이
최근 이스탄불은 유럽에서 가장 살기 좋은 최고의 도시로 선정되었다. 비교적 싼 물가와 역사적인 유물, 풍요하고 다양한 문화를 간직한 저런 도시가 드물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의 번화가 탁심 광장의 인파와 트램 /픽사베이

1차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연합군과의 독립전쟁을 치른 후 1930년 튀르키예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꾼다. 그런 다음 수도를 동쪽 아나톨리 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앙카라로 옮긴다.

최근 이스탄불은 유럽에서 가장 살기 좋은 최고의 도시로 선정되었다. 비교적 싼 물가와 역사적인 유물, 풍요하고 다양한 문화를 간직한 저런 도시가 드물기 때문이다.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의 <오리엔탈 특급열차>의 종착역이 바로 이스탄불이다. 지금도 도시의 유럽지구 광장에 그 종착역은 자리하고 있다. 파리에서 출발한 특급열차는 1977년 부다페스트로 그 종착역이 바뀌었다. 2025년 1박에 500만원으로 그 화려함의 극치가 복원된다고 하니, 꿈의 기차를 한번 타보기를 바란다.

이제 이스탄불의 골목길 상점에 선물을 사러 가보자. 만약 한국인임을 알아본다면 서슴지 않고 ”마이 브라더”하고 부르며 최대한 물건값을 깎아주려 할 것이다. 그들은 한국인을 형제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건 상술이 아니라 진심이다.

이스탄불 골목 상인들은 한국인을 형제라 부르며 꽤 괜찮은 물건을 싸게 팔려 한다. /픽사베이
이스탄불 골목 상인들은 한국인을 형제라 부르며 꽤 괜찮은 물건을 싸게 팔려 한다. /픽사베이

왜 튀르키예인들은 한국을 좋아할까. 튀르키예는 오랜 역사를 두고 러시아와 대립해 왔다. 특히 2차 대전 패전 이후 캅카스 일대의 영토를 러시아에 빼앗겼다. 이로 인해 튀르키예의 국민감정은 러시아를 불구대천지원수로 본다. 흑해를 중심에 두고 끊임없이 영토 분쟁을 해온 역사적 악연이 깊다.

그런 러시아가 극동의 한국 침략에 개입했다고 하니 분기탱천,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참전하여 예니체리의 후예답게 용맹하게 싸워 큰 전과를 거두었다. 참전 군인 규모도 3만여명으로 미국 영국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그중 약 1000명이 전사하고 2000명이 부상했다.

돌궐족의 후예 튀르키예는 고대에도 지금도 이렇게 한국과 인연이 깊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스탄불의 구불구불한 길의 골목 상점에 가보면 그 인연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는 한국인이라면, 오랜만에 만난 핏줄이나 되는 것처럼 반가워하며 친절을 베푸는 아저씨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꽤 괜찮은 물건을 싸게 팔겠다면서 붙잡을 것이다.

역사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 있는 보스포루스의 이스탄불, 그곳은 분명 특별한 도시이다. 언제 한번 가보기를 바란다. 푸근하고 풍성한 그 도시의 기억,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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