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옥의 일상다반사]
노벨상 수상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 <설국>
그 배경지에서 만난 독특한 ‘헤기소바’ 맛의 추억
그건 벼르고 벼르던 일이었다. 인상적인 도입부로 유명한 소설 <설국>의 무대를 찾아가는 일이 그것이다. 두어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옆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여정은 왠지 멀게만 느껴졌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 <설국> 중에서 -
요즘은 휴대전화 하나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구글 맵이나 인터넷 검색이면 안 될 게 없다는 얘기다. 더구나 저 먼 아프리카 오지마을도 아니지 않은가? 더해서 그토록 유명한 작품의 배경이니, 뭐든 기념하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습성상 문제는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나의 안일한 예상은 쉽게 빗나가고 말았다. 아! 물론 소설의 주요 무대인 니가타 에치고유자와(越後湯澤)에는 설국 기념관도 있고 소설 속 주인공이 장기간 머물던 료칸(旅館)도 그대로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설국>의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그곳에서 작품을 완성했다고 하니 대표적인 장소임엔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보고 싶었던 곳은 따로 있었다. 그토록 유명한 첫 문장을 만들어낸 그곳, 바로 시미즈 터널이다. 또 한 곳은 무료하기 그지없던 주인공의 발길을 끌어낸 지지미 마을이다. 우선 터널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향해
우리 부부가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통과한 터널은 다이시미즈 터널이라고 했다. 아쉽게도 소설 속의 그곳은 아니다. 주인공처럼 우리도 현의 접경을 지나기 위해서는 니가타현 에치고유자와 역에서 하루에 다섯 번 운행하는 미나카미(水上)행 열차를 타야 한다.
복잡하긴 하지만 니가타현을 넘어서 군마현 미나카미 기차역에서 내려야 한다. 그곳에서 해 질 녘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나카오카행 완행열차를 타는 여정이다. 그래야 소설 속의 그곳, 시미즈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나카미행 열차 탑승부터 시작해야 한다. 기차는 30여 분 만에 우릴 미나카미역에 내려 줬다. 역 주변은 온천 관광지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게 한산했다. 가을을 서두르는 보슬비가 내리고 상점들은 벌써 문을 닫는 중이었다. 추석 무렵이었지만 눈의 고장인 그곳은 벌써 초겨울을 방불케 하는 한기가 가득했다.
상점들이 문을 닫았으니 할 일이 없었다. 하릴없이 낯선 거리를 그냥 걸었다. 거리에는 폐점한 지 오래인 듯 보이는 온천장들이 드문드문 있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계곡 위 흔들다리가 으스스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
그 흔한 카페조차 보이지 않는 거리를 걷다 보니 '모든 게 헛수고'라고 되뇌던 소설 속 주인공의 대사가 생각났다. 이토록 별 볼 일 없고 재미없는 여정이라면 혹시 말짱 헛수고가 되는 건 아닐까? 아니다, 그 시미즈 터널 찾아가기만큼은 '헛수고'가 되지 않게 기운을 내보기로 했다.
드디어 5시 47분발 나카오카(長岡)행 기차가 도착했다. 승객이라곤 우리 부부와 겨울 누비옷을 차려입은 어르신, 그리고 이런 산골에선 귀한(?) 존재인 초등학생이다. 등에 멘 노란 란도셀이 앙증맞다.
기차는 출발했고, 터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시미즈 터널은 소문대로 깊고 길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한참이나 달려갔다. 얼마나 긴가 하면 터널 안에 역이 두 개나 있을 정도다.
드디어 군마현에서 현의 접경을 지나 터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니가타현 쓰치타루(土樽) 역에 도착했다. 소설 속의 바로 그 '신호소'가 있던 곳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시선이 머물던 차창 밖 풍경은 폭설이 내리던 한겨울이었다.
우리 부부가 방문한 계절은 가을이지만 산골 무인역인 이곳의 쓸쓸함은 한겨울 못지않게 추운 느낌이었다. 제아무리 추운 고장 설국이라지만 아직은 9월 하순, 밤의 밑바닥은 책 속에서처럼 하얘지진 않았다. 하지만 마음만은 이미 하얀 설국이다.
지지미의 고장에서 소바를 맛보다
다음날엔 지지미마을 오지야(小千谷)로 향했다.
눈 속에서 실을 만들어 눈 속에서 짜고 눈으로 씻어 눈 위에서 바랜다. 실을 자아 옷감을 다 짜기까지 모든 일이 눈 속에서 이루어졌다. '눈 있는 곳에 지지미 있으니, 눈은 지지미의 모태로다'라고 옛사람도 책에 썼다.
- <설국> 130p, 민음사 -
또한 지지미 바래기가 끝났다는 것은 눈 지방에도 이제 봄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였으리라. 그토록 고생한 무명의 장인(匠人)은 이미 죽은 지 오래고, 아름다운 지지미만이 남았다. 온 마음을 바친 사랑의 흔적은 그 어느 때고 미지의 장소에서 사람을 감동시키고야 마는 것일까?
- <설국> 136p, 민음사 -
내가 아는 그 시원한 여름옷인 지지미를 말하는 것일까? 설마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나온다는 건가? 궁금했다. 참고로 지지미는 바탕에 잔주름이 생기도록 직조한 옷감을 말한다.
우리가 머물던 에치고유자와에서 로컬기차로 한 시간 거리엔 오지야(小千谷) 지지미 마을이 있다. 소설 속에서 꿈처럼 아련하고 환상적으로 묘사되었던 곳이다. 지금은 비단잉어로 매우 유명한 지역이라고 한다.
달랑 두 칸짜리 기차는 믿을 수 없게 낡은 모습이었다. 서울의 9월은 가을 햇살로 따가웠는데 오지야행 기차는 철 이른 히터의 열기로 뜨거웠다. 역시 눈의 고장이라 추위가 빨리 오는 모양이다.
기차는 손으로 문을 밀어야만 열리는 우리네 그 옛날 완행열차의 모양새다. 문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가는 목적지를 지나치기 십상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은 좋은 의미로도 쓰인다는 걸 알았다. 마침, 동네 전통 직물 공방에서 지지미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거 아닌가!
'지지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면 지지미와 삼실을 뽑아 만든 마 지지미가 있다. 면 지지미는 주로 속옷으로 입는 보편적인 여름용 옷감이다.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올록볼록한 질감이다. 반면 마 지지미는 고급스러운 사치품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 그 지지미는 바로 마 지지미다. 여기 사람들은 치지미라고 부른다.
택시 기사는 시종 의아한 표정이었다. 무슨 그깟 지지미를 보러 오느냐며, 온 김에 비단잉어 전시관이나 가보라고 했다. 그리 크지 않은 전시장은 책 속 문장처럼 고운 빛깔로 온몸을 내어주는 보랏빛, 쪽빛의 지지미가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시골 전시장답게 관객이라곤 달랑 우리 부부 둘뿐이었다. 심심해 보였던 직원도 딱히 설명해 줄 요량은 아니었다. 지지미를 직조하는 과정과 기계를 사진과 실물로 전시하고 있다. 값비싼 기념품까지 구색은 갖추고 있었다. 직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나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보는 걸로 만족해야만 했다.
전시장을 나와 다시 기차역으로 갔다. 소설 속 주인공은 지지미 마을을 하릴없이 싸돌아다니다 우동을 먹는다. 하지만 우리에겐 정해진 기차 시간이 있고 겨우 한 시간 남짓의 여유밖엔 없었다.
우동집을 찾다가 발견한 곳은 소바 가게였다. 니가타현의 명물이라는 헤기소바를 맛볼 기회가 저절로 온 것이다. 헤기라고 부르는 그릇에 해초가 들어간 푸르스름한 소바를 내어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얼핏 보면 대식가의 음식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적당한 양이다.
맛은? 솔직히 그저 그랬다. 감칠맛도, 그렇다고 짠맛도 단맛도 없는 밍밍한 면은 자꾸만 김치와 단무지를 소환했다. 하지만 그런 게 나올 리는 만무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우동으로 우린 헤기소바로 지지미 마을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생각나는 맛이란 이런 것일까? 가끔 기억 속의 소바 맛과 소설 속 장면들이 떠오르곤 한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가지런히 놓인 헤기소바를 그리며 추억을 음미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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