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어느 날 도시에서 살던 중년 여자가
삼거리 모퉁이에 구멍가게를 차렸다
조용하던 시골 동네에 분홍 바람이~

정겨운 시골 가게의 모습이 옛 추억을 가져온다. AI를 사용하여 생성함 /MS Bing
정겨운 시골 가게의 모습이 옛 추억을 가져온다. AI를 사용하여 생성함 /MS Bing

가끔은 국수를 말아 동네 어르신들을 대접하면 농담 삼아 나에게 국수 장사를 하라고 부추긴다. 오가는 손님이 없어도 그들이 매상을 책임질 거란다. 하하.

나이 드신 어른들에게 툭툭 반말하고 예의도 없는 나를 좋게 봐주시고 자주 불러주니 고마운 동네다.

문득 오래전 시골 살 때 분홍 집 가게주인을 닮아 가는 나를 발견한다. 시골이라 오가는 낯선 손님 하나 없어도 늘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던 곳, 담배도 팔고 술도 팔고 노인들에겐 가끔 공짜 국수도 삶아주던 작은 가게다.

어느 날 도시에서 살던 중년 여자가 마을에 홀연히 나타나 삼거리 모퉁이 빈집을 사서 수리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뚝딱뚝딱 고치고 칠하더니 마침내 예쁜 구멍가게로 변신했다. 조용하던 시골동네에 만남의 장소가 되어 남정네 입에 자꾸 오르내리고 외출할 땐 영감들의 옷매무새도 바뀌니 부인들의 눈은 모두 가자미눈이 되어 있었다.

있을 만한 것은 거의 없었지만 막걸리도 소주도 오징어도 온갖 생필품도, 꼭 있어야 할 것들은 다 있었다. 주민들은 주인이 있건 없건 일하다 힘들면 잠시 들러 툇마루에 걸터앉아 쉬기도 했다. 소금 몇 알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병을 꺼내 마시다가 남으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쉼터가 되었다가 주막도 되었다가 밥집도 되고 마트도 되었다. 가게가 문을 연 첫해엔 부인들이 몰려와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분홍 집에서 기다려", "분홍 집 가서 한잔 더하자."

술 좋아하는 남편 역시 분홍 집이 입에 착착 감겨 나왔다. 시골구석에 웬 색싯집인가 하고 처음엔 나 역시 미행해 봤지만 알고 보니 작은 구멍가게의 녹슨 함석지붕이 멀리서 보면 분홍색으로 보였다. 적당한 키에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화장기 없는 주인 여자는 나이 들었지만 잘생긴 것도 아닌데 잘생긴 듯 기품이 있었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광목 앞치마를 정복인 양 늘 입고 있어서 우아하고 품격 있었는데 입을 열면 사정이 달랐다.

막걸리 한잔에 부침개 안주면 진수성찬이던, 허기를 면하던 그 시절 /픽사베이
막걸리 한 잔에 부침개 안주면 진수성찬이던, 허기를 면하던 그 시절 /픽사베이

어느 날 분홍 집에서 동네 사람을 만나고 들어 온 남편이 느닷없이 물었다.

“킥인지 킵인지 그기 영어 같은데 뭔 뜻이고?”

“킥~은 공을 찰 때 킥 아닌가? 킥? 키? 킵?”

말인즉, 귀촌한 덩치 큰 남자와 막걸리 한잔하고 나오는데 그가 말했단다.

“분홍 여사, 이 막걸리 킵해 줘.”

그녀가 말했다.

“셀프야 셀프, 자기 것은 자기가 싸인해 넣어요.“

그녀는 냉장고에 매달아 놓은 볼펜 한 자루를 손으로 가리키며 종알거렸다. 남자들은 세련된 도시 언어가 멋있어 보여 볼펜에 침을 묻히며 싸인을 해 건넸다.

“분홍댁, 이 소주 킥이야.”

먹다 남은 막걸리가 킵, 소주도 킵, 번데기도 킵. 냉장고 안은 온갖 킵한 것들이 모여 복잡했지만 질서가 있었다.

누군가가 산 번데기 통조림 하나가 킵 되면 하루 종일 동네어른들의 안주로 돌고 돌았다. 장사를 하는 건지 봉사를 하는 건지 아랑곳없이 그녀는 어른들을 늘 반갑게 맞았다. 그곳에선 우울했던 일도 모두 녹아버리는 마력 같은 기운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농한기면 (분홍 집으로) 출근하는 영감의 손에 음식이 하나씩 들려져 왔다. 부인들이 만들어 보내는 거였다.

그녀의 미소와 환한 모습과는 반대로 짧은 반말에 입은 방정맞았다. 어느 땐 격상하여 선생님, 오빠라 불러주다가도 술 먹고 휘청대면 영구야, 영감님, 박씨 김씨 등 호칭도 그때그때 달랐다. ‘저거시 나를 갖고 노네’하며 지청구하면서도 어른 얼굴엔 싱글벙글 생기가 돌았다.

나이 들어 보니 귀가 안 들리는 어른이 부지기수라 말이 길어지면 난처해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너무 긴 존대보다 가벼운 반말이 어른들에겐 최선의 소통방식이란 걸 깨닫는다. 그녀의 현명한 처사를 경망하다고 흉보던 나였다.

“하얀댁, 밥 무러 건너오소.”

건너편 청기와집 여자는 청기와댁으로 불린다. 우리 집 지붕은 주홍색, 벽은 흰색인데 주홍댁이라 부르면 너무 야시시한지 이웃들은 나를 ‘하얀댁’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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